넘어진 김에, 쉬었다 가지

- 몇 가지 에피소드, 연남동 산책

by 스침

# 잊히지 않는 대화

- 살면서 선명하게 기억되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통의 일상은 나른하고 보편적이어서 기억의 창고에 보관되지 않는다. 기억되지 않는다면 기록하면 될 일.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고 펜이 탑재된 핸드폰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매일 밤, 폴더에 저장하는 수고만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매우 효과적 방법이다. 그렇게 '20240217연남동'이란 폴더엔 평범한 하루가 기록됐다.


- 요즘 딱히 바쁜 프로젝트가 없어 한가롭다. 그렇다고 무료하진 않다.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고 수정할 생각들도 많아서다. 한 번은 진행하던 일이 지지부진해진 적이 있었다. 일에 있어서만큼은 태생적으로 조급하고 안달복달하는 편이라 짜증이 났다. 무언가가 통제되지 않을 때 불안해하는 건 나의 고질병이다.


- 그런 나에게 파트너였던 광고회사 출신 선배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가시게나."

업무를 총괄했기에 나보다 더 마음 졸였을 선배의 얘기에 흠칫 놀랐다. 다부진 사람은 위기의 순간, 차분해질 수 있는가 보다.

한때 나무였던 문이 나무 그림자를 품고 있다. ⓒ 스침




# 산보(散步)

- 넘어졌을 때, 내가 가장 즐기는 게 산보다. 행선지나 목적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선다. 문을 열고 나서는 일은 따분한 일상에 외투를 입히는 동작이다. 내가 산책보다 산보란 단어를 좋아하는 건 '걸음을 흩어놓는다'는 의미가 더 좋아서다. 다분히 문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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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침


- 발 편한 운동화와 날씨에 맞는 옷차림으로 나선 거리는 늘 은밀한 나만의 관찰을 허락한다. 각기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다양한 표정의 사람들이 곁을 지나간다. 그 사람들 속에서 나는 상호만큼이나 다른 쇼윈도를 통해 주인의 취향을 평가하고, 요즘의 트렌드를 가늠한다. 물론 나의 주관적 판단과 평가는 비공식적이며 별반 쓸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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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침

# 밖에서의 혼술은 어렵다

- 집에서야 다반사지만 밖에서의 혼술, 혼밥엔 용기가 필요하다. 게다가 종사자들의 휴식을 보장하는 브레이크 타임은 밥때가 일정치 않은 나 같은 족속의 허기를 달래주지 않는다. 편의점이 없었다면 끼니를 거르기 십상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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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침

# 활자와 이미지

- 초짜 시절 첫 직장에서 서류에 오타를 낸 적이 있었다. 상사가 딸기밭(빨간펜으로 수정한 서류를 그렇게 불렀다)이 된 서류를 돌려주며 혼잣말인지 들으란 건지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말이 맞아. 요즘 애들은 활자를 이미지로 인식한단 말이야. 한심해, 쯧쯧."

자존심이 상한 나는 이후 이미지의 인식 수준을 높여 더 이상 오타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마셜 매클루언의 "메시지는 받는 사람에 의해 수정된다"는 또 다른 명언을 증명했다.



ⓒ 스침






- 자주는 아니었지만 협소한 연남동 동진시장을 둘러보는 맛이 아주 좋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탓인지 재개발 때문인지 상점들은 모두 철시했고, 폐광산처럼 방치되고 있었다.












DSCF0453 - 복사본.JPG ⓒ 스침

- 그나마 옆 골목 '헬로 인디북스'의 생존이 반가웠다. 소설가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를 사들고 나왔다. 편집숍의 일종인 독립서점 역시 옷가게처럼 주인의 취향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내가 원하는 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걸러진 책 중에서 내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다. 매머드 서점과 다른 길을 걷는 골목 안 서점들을 응원한다.


















- 책 한 권과 하루의 기억을 담은 메모리 카드를 들고 다시 나는 섬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