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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람 Aug 24. 2023

첫 번째 브리즈번 일기


 잠을 조금 설치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났다. 밥은 먹고 가야지 싶어 밥을 먹는데 훌훌 날리는 쌀알에 목이 막힌다. 결국 몇 술 못 뜨고 일어났다. 부산스럽게 짐 싸고 나오니 새까맣다. 진짜 너무 무서웠다. 본 적은 없지만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이나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첫 차를 타고 떠나는 여정이라 일찍 출근하는 근로자 분이랑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엄한 사람인데 나한테 해코지라도 할 까봐 없는 상상을 한다. 여차하면 그 사람 밀치고 도망갈 걱정도 했다. 다행히도 버스 무사 도착. 내 카드가 무사하지 않은 것만 빼면. 자꾸만 유효하지 않은 카드라면서 찍히질 않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 하나 당황했는데 기사님이 그냥 있어란다. 현금으로라도 돈을 드릴랬는데 받지 않으신다. 죄송합니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리에 앉아있는 아주머니께 결재를 부탁해 봤는데 거절하셨다. 알고 보니 호주 버스카드는 한 사람당 한 번 찍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한 카드로 두 명이 탈 수 있는 걸 생각하면 번거롭고 깐깐한 규칙으로 보인다. 아 우리나라 가고 싶다! 현금도 되고 카드도 되는 멋진 나라! 환승 역에서 잠시 밥을 퍼먹는 여유도 보여줬으나 눈치 보면서 다시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다행히 두 번째 버스에서는 카드가 잘 찍혀서 무안하지 않게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글을 한참 쓰고 잠 좀 자다 보니 그새 브리즈번 도착! 내 짐이 얼른 나온 덕분에 난 얼른 짐 들고 도착시간이 1분 남은 기차를 타러 갔다. 신나게 달렸더니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차창 밖의  그 길이 아름다웠다. 하늘도 맑고 푸른 나무 색이 시원했다. 구름 덕분에 하늘이 더 파랬다.

 오전 11시에 센트럴 역에 도착했다. 숙소는 오후 3시부터 들어갈 수 있었다. 정시 체크인이라 한참 기다려야 했다. 새벽에 일어났더니 늘 하던 기다림도 조금 힘들었다. 또 글을 썼다. ‘salt and spicy'라는 카페에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에스프레소만 마시는 어른들만 모인 묵직한 분위기라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숙소 바로 앞에 스타벅스가 있다. 반가운 마음으로 갔다. 스타벅스도 와이파이를 순순히 안 내준다. 비밀번호가 어디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숙소 들어가서 인터넷을 마음껏 하리라 다짐했다.     

  프런트 직원은 호주 사람 아니고 동남아 쪽 사람 같은데 영어를 도통 못 알아듣게 한다. 그리고 본인도 내 영어 못 알아듣는다. 인상을 팍 구개는데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거 우리 다정하게 좀 서로에게 말합시다. 호스텔이라 그런가 은근히 까다로운 체크인이 귀찮았지만 뭐 어때. 도심 속 위치에 1층 울월스 마켓까지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날 설레게 했다. 고개 들어서 하늘을 계속 쳐다보게 되더라.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도 재밌어.

 숙소는 사진으로 봤을 때는 깔끔한 인테리어를 한 널찍한 방으로 내 온갖 기대를 끌었지만 실제로 보니 도심 속 애들레이드 호텔이다. 상당히 오래되었단 뜻이다. 그래도 창문을 열 수 있다는 점과 호주의 오래된 건축물 양식이라는 점이 좋았다. 예전에 숙소 잡을 때 호주스러운 곳을 잡고 싶었는데 어쩜 가는 데마다 다 그렇네. 돈을 어중간하게 써서 그런갑다. 탁자과 의자도 있다.    

여기 숙소 재밌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와이파이가 유료다. 상당히 앞뒤가 안 맞다. 그리고 빨래 시설이 하나도 없다. 첫 번째 숙소에서는 세탁기부터 건조기까지 자유롭게 쓸 수있어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덕분에 빨래 망에 쑤셔뒀던 옷 다시 꺼내서 상태 괜찮은 것은 향수 뿌려서 널어놨다. 옷이 정말 더럽지 않으면 다시 입기로 한다. 속옷과 양말은 손빨래했다. 나름 아끼는 양말들이라며 제대로 손 빨래 해 준 적이 없어 미안하기는 개뿔 귀찮다. 널 자리도 마땅치 않다. 나무 가구가 많아서 싱크대에 잔뜩 널었다. 싱크대야 미안해. 티브이와 조명에는 향수 뿌린 옷을 잠시 널었다. 티비와 조명에게도 미안해. 너네들에게는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 숙소에 들어온 지 1시간 만에 집안 곳곳에 영역 표시를 확실하게 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함부로 옷을 갈아입고 살았는지, 세탁기에게 감사한 줄도 모르고 옷을 마구 입어댔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브리즈번 경기만 보러 온 축구 친구의 숙소에 놀러 갔다. 멀지 않아서 걸어가는데 진짜 좋았다. 강 건너 달리는 기차도 예쁘고 해지는 노을도 예뻤다. 강변 따라 열심히 뛰는 사람도 예쁘고 철썩이는 강물도 예뻤다. 노래도 들으니까 마치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전은하 선수님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뒤에 있던 사람이 "풋볼?' 이러면서 중얼거리는 것도 들었다. 한글 못 읽어서 금방 관두더라.     

 강 따라 시원한 공기 맞으며 열심히 걸어서 친구 집 도착! 나 온다고 여러 가지 음식을 분주히 하는 친구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다 같이 여행 온 마당에 얻어먹다니, 고마운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훨씬 컸다. 고기를 사갔는데 이미 고기가 있던 친구에게는 후식이 더 나았을 거 같단 생각도 든다. 빡빡하게 굴러가는 축구 일정에 고생하는 선수들 걱정, 마음 같지 않은 경기력에 대한 한탄으로 축구 이야기는 조금 씁쓸했지만 어쨌든 재밌다.     

 해가 많이 지기 전에 다시 우리 집으로 걸어왔다. 그때부터가 진짜였다. 야경이 반짝반짝하는데 유라의 '수영해'를 들으면서 가니까 기분이 몽롱하니 좋았다. 근본 모를 오기로 한 곡반복 재생하기 싫어서 설정은 안 해놓았다. 사실 노래 하나를 질리도록 듣는 걸 좋아하는데 '수영해'는 금방 질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핸드폰을 굳이 꺼내서 다시 듣기를 눌렀다. 목소리가 야경에 더해져 일렁이는 그림자처럼 눈앞에 보이는 기분.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그 기분이어서 더 좋았다.     

집에 와서는 글을 쓴다. 우아하게 말하지만 사실 샤워 마치자마자 친구가 준 쌀밥과 김을 허겁지겁 먹었다. 걸어온 거리가 꽤 되어선지 집 오니 무지 배고팠다. 코리아 디저트가 제일이다. 홍차도 있어서 따뜻한 물에 우려 놓고 기내식으로 나온 초콜릿 브라우니를 함께 먹는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브리즈번에서의 첫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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