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람 Aug 27. 2023

네 번째 브리즈번 일기

8.4. 이제 나의 호주는 텅 비었다.   

 어제 만난 축구 친구와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해서 그전에 글을 정리할 겸 스타벅스로 왔다. 더 지체할 틈이 없다. 쓰던 일기를 얼른 완성해야 한다. 내 영어 실력이 부끄러워도 와이파이 쓸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여기 와이파이 쓸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더듬더듬 물으니 매일 지나치던 그곳에 비밀번호가 떡 하니 있었다고 알려준다. 너무 어이가 없다. 두려움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 그걸 언제쯤 극복할 수 있을까.

 속상해하며 글을 붙여 넣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시던 한국인 직원분이 말을 걸어오셨다.

‘워홀 오셨어요?’

 이 정도면 세미워홀이지. 부업같이 하는 일(=여자축구 사랑하기, 여자축구 그리기, 여자축구 글 쓰기)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 여름휴가까지 노렸어요!라고 긴 생각을 짧게 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여자월드컵 보러 왔다.’고 말씀드렸다. 며칠 전에도 내가 한글로 쓰인 유니폼을 입고 와서 한국인으로 알고 계셨는데 오늘은 마침 점심식사 시간과 겹쳐 내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한다. 그냥 손님이구나 하고 넘겼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나를 아는 척해주니 참 고마웠다. 짧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여유로운 도시가 있는 호주는 살기 편안하다는 것, 그리고 편안한 만큼 무료하다는 것. 내가 여자축구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점도 이야기했다. 그림도 좋아하신단다. 단아한 분위기에 수채화가 어울려 그걸 하시나 물었더니 그렇단다. 원래의 고향과 내 지금 있는 곳도 굉장히 가까워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런 분께 그림을 그려드리려고 2주 만에 펜슬을 꺼냈는데 웬걸, 펜슬 촉이 사라져 있다. 참내, 이게 없어진 줄도 모르고 여태 살았단 말이야? 정말 그림을 하나도 그리지 않은 티 팍팍 내는군. 먼저 그려주겠다 해놓고 못 그려드려 죄송했지만 그분께서 친절하게도 스타벅스 굿즈를 사면 30퍼센트 할인도 해준다 하셨다. 나는 입구부터 가득히 누워있어 눈길이 가던 코알라 곰돌이 인형을 샀다. 코알라나 쿼카 굿즈를 갖고 싶어 하던 동생에게 줄 참이다. 다른 기념품 샵도 같이 구경시켜 줄까 하고 물어보셨지만 코알라를 직접 보러 가야 할 시간이 될 거라고 이야기했다. 다정하고 친절한 이 분이랑 함께 갔다면 또 어떤 브리즈번을 만나게 되었을까? 현지인과 함께하는 그 기회를 놓치게 되어 아쉬웠다. 나는 약속시간이 되어 가게를 나서고 그새 바빠진 가게에 분주한 그분께 인사를 드렸다. 나오는 길에 던지듯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했다. 한국인인 그녀만 알아듣겠지 싶었는데 너무 바쁜 나머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서 그분은 바삐 일을 계속하셨다.

 집에서 조금 쉬다가 약속 장소로 나왔다. 축구친구는 이제부터 별씨라고 부르겠다. 별씨는 센트럴 역의 다른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코알라 공원에 가는 택시를 부르고 잠깐 이야기를 했다. 약속장소로 올라오는 길에 선수들을 많이 만났더라. 시드니에서도 만나고 여기에서도 대표팀들을 많이 만났다 했다. 가람 선수, 윤지선수, 은선 선수와 금방 사진 찍고 올라오는 길이란다. 나는 부러움에 애가 타 ‘지금이라도 제가 좀 달려갔다 와보면 안 될까요?’라고 징징댔다.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 이렇게 떼를 쓰는 게 조금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이미 택시는 다 와 가고 선수들도 어디로 갔을지 모르는 마당에 내 욕심만 부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가다듬고 택시가 서 있는 맞은편으로 갔다. 체념보다는 코알라에 대한 기대로 택시를 타려고 했다. 평정을 찾은 내 눈에 공원으로 가는 길이 비쳤다.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가는 길은 호주 어디에나 아름답다. 힘들던 애들레이드조차 그랬다.

 시드니에서 코알라를 한 번 보고 왔다는 별씨를 위해, 나와 동행해 준 그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공원 입장권을 샀다. 어쩔 줄 몰라하는 별씨, 그냥 받아주세요. 덕분에 제 여행이 더 밝아졌어요. 얼렁뚱땅 영어로 입장권을 확인받은 뒤에 들어갔다. 확실히 공원이라 그런지 넓은 동산에 동물들이 조금 자유로워 보였다. 아주 조금.

깡패 호주 따오기 대신에 호주 칠면조 같은 게 있었다. 얘네도 그리 성격은 좋지 못했다. 캥거루 사료를 조금 뿌려주니 달려들어서 조금 무서웠다. 앵무새 종류는 철창사이에 갇혀 있었다. 토끼와 기니피그, 병아리는 실내 동물원의 흔한 체험처럼 좁은 우리 안에 모여있었다. 만져도 되는 것처럼 ‘손 씻고 만지세요. 만지고 나서도 손 씻으세요.’라고 안내문이 있었다. 스트레스 꽤 받겠네.

 캥거루는 확실히 신나 보였다. 캥거루 동산에 자유롭게 산다. 팔자 좋게 드러누워 먹이를 받아먹거나 두둑한 먹이주머니를 든 사람들을 찾아 뛰어다녔다. 책이랑 영상에서만 보던 애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희한한 비율에 웃음이 나왔다. 뒷다리는 저렇게 길고 튼실한데 앞다리는 그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그러면서도 주워 먹을 때는 앞발을 야무지게 잘 쓴다. 얼굴은 사슴과 낙타 그 사이 어디쯤. 손바닥의 사료를 싸악 긁어먹느라 이빨이 닿으면 나도 모르게 손을 빼 버렸다. 사람 누워있듯 요염하게 누운 애들이 너무 웃겼다. 사료받아먹을 때도 요염한 자세는 풀지 않는 것도 건방진 게 귀여웠다. 어느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사료 많이 먹어서 배불러한댔는데. 여기 캥거루들은 굶주려 있었다. 조그만 왈라비들 찾아다니며 먹이를 주다가 사료 봉투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다가온 붉은 캥거루들의 장대한 기골에 압도되고 말았다. 캥거루 3마리에게 둘러싸여서 먹이를 주는 경험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사료 없다고 하면 한 주먹 칠 지도 몰라 마지막 사료가 담긴 봉투는 캥거루 얼굴에 씌우듯 줘버렸다. 녀석들 똑똑해서 손으로 금방 빼더라.

 코알라는 갇힌 듯 공개된 나무에 달려있었다. 처음에는 캥거루 뜰 밖으로 나온 곳에 코알라 존으로 마련되어있어서 그곳에만 있는건가 싶었는데 조금 더 돌아다녀보니 그냥 제주도에 귤나무 있듯 나무마다 코알라가 열려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꽉 껴서 자는 게 귀여웠다. 자는 동료 하나도 신경 안 쓰고 마구 밟고 다니는 것도 코알라의 무던한 성격이 보여 재밌었다. 바닥에서 움직이는 코알라는 굉장히 빨랐다. 동그란 털공 닮은 것이 네 다리로 힘차게 뛰어간다. 안아보기 체험 너무 해보고 싶었는데 신청이 늦어 못 했다. 대신 안아주기를 위해 출근하는 코알라를 찍었다. 비몽사몽 하지만 나무통째로 들려가는 모습이 조금 웃기기도 하고 안쓰러웠다. 너네도 힘들게 밥 벌어먹고 사는구나. 예약 못한 핑계, 코알라 상태가 상당히 더럽다는 정보를 핑계로 우리의 코알라 공원 체험은 금방 마쳤다.

 나와서는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 먹었다. 맛있어. 진한 크림맛이다. 난 어른답게 스프링클은 뿌리지 말아 달라 했는데 뿌렸으면 예뻤을 거 같아 지금은 좀 아쉽기도 하다. 별씨는 파워에이드를 마셨다.

 저녁식사도 함께 하자고 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소중한 하루를 통째로 앗아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별씨가 여행 친구로 마음에 들어서 욕심을 좀 부렸다. 호주에 머물면서 다른 나라 경기도 많이 보러 가고 팬페스티벌에 가서 야외 관람도 하며 여자 월드컵을 다양하게 즐기는 모습, 내가 꿈꾸던 여러 가지 일들을 전부 하고 있던 모습, 축구에 진심인 모습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이야기를 하는 게 재밌었기 때문이다.  내 사회성이 바닥을 치고 있던 중에 만나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는데 착한 별씨는 질문도 곧잘 한다. 즉흥 그 자체인 우리는 길 걷다 마음에 드는 식당 아무 데나 들어가서 밥을 먹기로 했다. 어두침침한 조명,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게가 눈에 들었다. 예약했냐고 묻는 점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예? 이러다가 그냥 점원은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줬다. 아, 영어 자격지심 얼른 영어공부로 낫게 해야 하는데. 한국 돌아가서도 이 의욕 여전하길 바라며 얼른 안으로 들어가 메뉴판을 살폈다.

 나름 호주가 소고기로 유명하기에 나는 소고기 구이를 시키고 별씨는 팟타이를 시켰다. 어두운 가게 안은 네온사인으로 번쩍거려 술집 같은 흥겨움에 들떴다. 생각과 다른 맛과 지난 2주 동안 굶주리며 줄어든 위장으로 나는 몇 술 못 들고 말았다. 다행히도 별씨는 잘 먹었다. 남이 잘 먹는 모습만 봐도 즐거운 나는 만족스러운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축구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수단 지금 출국 준비한다고. 저녁 7시 반까지 공항으로 오란다. 별씨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내키지 않아 보였다. 귀엽고 착한 그에게 추억을 더 만들어주고 싶지만 이 또한 내 고집인걸 안다. 잠깐이지만 옷가게도 구경하고 대한민국 유니폼만 30퍼센트 할인하는 조금 안쓰러운  상황을 마주한 뒤 우리는 헤어졌다. 둘의 축구 열정이면 언제든 대한민국 축구가 있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페리를 같이 타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조금 아쉽네. 어쨌든 오늘 하루 할미 잘 놀아줘서 고맙습니다 별씨.

 공항에는 친구가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걸 깨달은 나, 경기장에서 친구가 말해준, ‘기 눌릴 게 뭐 있어!’하는 말로 수많은 다른 나라 팬들 사이에서 내가 더 당당하게 축구를 즐길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 했다. 선수들의 항공편을 살펴보는데 출발 시간에는 아시아나 항공이 아니라 중화항공 비행기가 출발한다. 대회 성적이 안 좋다고 1등석에서 순식간에 저가항공사의 경유비행기를 부른 축구협회가 소름 끼쳤다. 여자축구는 시스템 전반적으로 다 문제인데 전부 선수 탓만 하고 있는 게 안타깝고 짜증 난다. 아 이번 여행에서 얻게 된 게 참 많네. 진짜 내가 성공해야 할 이유, 돈 많이 벌어서 우리 선수님들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축구시켜주고 싶다. 다들 순식간에 대한항공 퍼스트클래스 탈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선수단이 도착했다.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도 하고 다정한 선수님들은 내 그림 고맙다고 인사도 해 주셨다. 다들 깜찍한 점이 내가 봉투에 붙여뒀던 스티커를 핸드폰 케이스에다 붙이고 있었다. 정미 선수님은 핸드폰 케이스를 들어 직접 보여주는 게 정말 감사했다. 무슨 이런 귀여운 사람들이 다 있어? 왜 이렇게 사랑스러워? 이러니까 뭘 해줘도 선물할 맛이 나잖아! 미라 선수는 그냥 지나쳐 보낼 수 없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줄줄 따라다니며 일정을 묻고 다음 경기에서 또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예전이라면 짧은 시간의 만남에 안타까움이 컸을 테지만 이제는 언제든 만날 수 있단 걸 알아 그리 아쉽지도 않다. 천가람 선수는 짧게 악수하고 가고 지소연 선수는 여유롭게 내 그림을 칭찬해 주시면서 가셨다. 세상에 이금민 선수랑도 하이파이브를 했어 내가. 예빈선수랑도 하이파이브해서 기뻐.

 체크인 후 잠깐이라도 더 만날 수 있을 줄 알고 기다렸는데 얼른 떠난 그들이다. 다들 옷은 어찌나 야무지게 벗어뒀는지 원래 형광빛이던 사람이 무채색으로 달라져서 가버리니까 가는 줄도 모르고 보내버렸다.

마중하고 돌아온 나를 맞아주는 고마운 맥도날드. 낮에 문 닫는 가게가 많은 호주에서 귀하게도 오래토록 장사하는 맥도날드.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허한 마음을 감자튀김과 모카로 달래보려했다. 쉽게 달래지진 않았다.

이전 10화 세 번째 브리즈번 일기, 나는 당신들을 사랑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