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일찍부터 떠졌다. 숙소 정리는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남겨둔 식재료 처리를 위해 부지런히 먹었다. 평소에는 잘 먹던 양배추인데 사둔 지 좀 지나서 그런가 입안에 욱여넣다가 어느 순간 토증이 느껴져서 뱉어버렸다. 역한 아침 식사를 마무리하고 방을 깔끔히 정리했다. 빠진 건 없는지 숙소를 확인하고 나왔다.
와이파이가 안 된다는 이유로 만족도가 떨어지던 신기한 곳. 디지털 디톡스를 도전했으나 중증 전자기기 중독증 환자에게 그런 건 쉽지 않다. 데이터를 여기 와서 다 쓴 느낌이다. 서둘러야 할 거 같아 8시 반에 나왔다. 여행 중에 분주하게 구는 게 싫단 사람이 이른 아침에 움직이는 게 웃기기는 했으나 아침 일찍 맞는 공기는 상쾌하니 기분 좋았다. 이제는 루틴이 무너지는 게 더 싫은가 보다.
기념품 샵에 들러서 코알라 키링을 샀다. 기념품이란 것도 신기하다. 한국 온 외국인들이 이태원이나 경리단길에서 한국스러운 물건을 사러 다니는 거랑 비슷한 걸까? 기념품도 다른 물건을 살 때처럼 고르는 기준이 필요한 건 아닐까? 언젠가 내가 굿즈를 디자인하게 된다면 환경을 생각하는 관광객에게 만족스러운 선택이 될 수 있게 하고 싶다. 한국스러운 멋이 있으면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그런 매력이 있는 물건. 가격도 합리적이고 만드는 방법도 친환경적인 데다 기부까지 하는 그런 환상적인 물건을 파는 꿈을 꿔 본다.
아, 캥거루 불알 병따개가 있었다. 이건 뭐지 하고 만졌다가 에이그머니나 하면서 내려놨다.(사실 앗쉬발뭐야 하면서 내려놨다.)
스타벅스 그분께 인사를 한 번 드리려고 찾아갔으나 오늘은 아예 안 계셨다. 생각을 많이 하고 말을 해야 하던 이곳에서 숨통 트이게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던 고마운 분. 언젠가 한국에서 뵐 수 있길 바라며 나는 또 이른 발걸음을 옮겼다.
열차 시간이 되어 기차에 올라탔다. 맑은 공기에 환히 보이는 풍경이 좋았다. 그 경치를 감상하며 가는데 호주 특유의 외곽 느낌이 났다. 공항으로 가면 이런 풍경이 아니었는데. 불안한 마음에 지도를 확인하니 아, 기차를 잘못 탔다. 공항 열차는 나 몰래(?) 연착된 상황. 운명처럼 그 시간에 도착한 딴 길 기차를 의심 없이 타버렸다. 멀찍이 시골로 빠져나가려는 기차에서 겨우 내렸다. 여기는 한 플랫폼에 여러 노선의 기차가 지나간다. 우리나라 기차역도 그런데 코레일은 좀 더 친절하게 전광판으로 안내를 해주는데. 지하철은 절대 헷갈리지 않게 타는 곳이 정말 정해져 있고 말이야. 당황한 나머지 나가는 출구에서 카드도 찍어버렸다.
상심한 표정으로 스케이트보드를 든 소년에게 공항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친절한 그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전광판을 보다가 방금 내가 내린 곳으로 공항 열차가 지나간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기차 몇 개 지나가면 그거 타세요라 하더만 내가 많이 고마워하니까 내가 기차 타고 가는 걸 보고 가겠다고 한다. 청년이 참 건실하니 착하다. 고마운 마음에 콜라라도 하나 사주려고 했는데 받지 않겠다고 한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이 도시가 마음에는 드는지, 뭐 하러 왔는지 짧게 물었다. 나는 월드컵을 보러 왔고 3경기를 봤다 하니 놀라더라. 이 날씨가 겨울이라는 게 신기하지 않냐길래 부럽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항 기차가 도착했다. 아이는 내가 타는 걸 보고 자기 타는 곳으로 돌아갔다. 참 친절하다. 호주 사람들이 스몰토크 좋아하는 게 어려웠는데 도움을 준 그가 물어주니 상냥하고 귀여운 질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저는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네요.
2시간 반 전에 도착해서 체크인 시간까지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공항 카페에서 좀 앉아있을까 싶었는데 물가가 미쳤다. 커피 한 잔에 11불? 이건 아니다 싶어 넝마처럼 짐 나오는 곳에 널려있다가 체크인 오픈하자마자 수속 밟았다. 호주는 워낙 땅덩이가 넓다 보니 셀프 체크인이 잘 되어 있다. 버스 타는 것만큼 간편하게 한다. 드디어 4번째 비행을 한다. 비행기는 원 없이 타고 가는 기분. 진짜 한국 돌아가면 앞으로는 푹 쉬면서 가만히 있어야지. 필라테스를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헬스보다 더 재밌고 건강하게 할 수 있을 거 같다.
전 소속팀이던 풋살팀 사람들과 연락을 했다. 독일전 천가람 선수를 인상 깊게 봤다는 언니, 관심 있게 봐줘서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다. 아 해야 할 일이 많네. 선수들도 소개해야 하고 풋살, 축구 지식도 설명해주고 싶다.
빈 속에 콜드브루를 먹어서인지 속이 많이 안 좋다. 비싼 값을 내고 먹었던 뮤즐리 요거트는 내가 여기 있는 내내 먹었던 뮤즐리 요거트에 비해 달아서 별로였다. 그래도 이번 비행은 1시간 반뿐이어서 다행이다. 잘 생각해 보니 이동 거리가 늘어났다. 만약 내가 돈을 더 쓰려고 마음먹었다면, 좀 더 내 상태를 걱정했더라면 브리즈번에서 대한항공 타고 바로 올라갔을 텐데. 다음에 해외여행을 갈 때는 돈을 더 모으던지 아니면 경유하더라도 이동 거리를 줄일 수 있게 계획해야겠다. 여행을 통해 배운 점이 너무너무 많다. 다들 여행을 이런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건가? 이유 없이는 남들이 다 하는 걸 따라 하기는 역시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기내식은 과자를 골랐다. 이 컨디션으로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 속이 더부룩하니 불쾌하다. 받은 프링글스 두 통은 가방에 쑤셔 넣었다. 부디 이 에어버스에서 내리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길 바라면서 자세를 고쳐본다. 이젠 방귀도 마렵다. 옆에 사람들은 모두 잔다. 총체적 난국일까 아니면 천년의 기회일까. 잠든 옆자리 사람이 내 방구냄새 때문에 깰까봐 나는 지성인의 길을 선택했다. 내 대장아 미안해.
무사히 내리고 마지막 숙소로 향했다. 한 20분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급히 잡느라 아무 데나 예약했더니 아쉬웠다. 다음부터는 교통이 편한 곳에 숙소를 잡아야겠다. 공항에서 멀기도 드럽기 멀고 와이파이가 또 유료다. 그럴 거면 와이파이라고 하지 마라. 여기 오면 와이파이 쓸 생각에 들떴는데 다 엉망이 되었다. 간이 화장실도 충격적이다.
저녁 식사를 할 곳이 마땅치 않아 맞은편에 마트에 갔다. 마침 육개장이랑 밥이 있길래 사 왔다. 오늘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 허겁지겁 물을 끓이고 라면이랑 밥을 같이 넣어버리는(;;;) 사고를 쳤다. 물론 일부러 했다. 완전 꿀꿀이 죽이 되었다. 면을 다 건져먹고 나니 밥은 먹기 싫어져서 버렸다. 돈이 아깝다. 내가 할 수 있는 돈지랄이 이런 거뿐이라서 그렇나. 성급한 처신이 안타깝다.
저녁 6시에 누워 하릴없이 있었다. 이대로 잠들면 새벽같이 일어나 비행기에서 힘들겠다 싶었다. 노래를 틀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른 방에게 피해 갈까 봐 조그맣게 노래를 틀고 춤사위는 거대하게 했다. 오랜만에 신났다.
호주 여행 마무리 영상도 찍었다. 목소리는 개미처럼 나오지만 나름 2주간 여행에 대한 소감을 담았다. 진짜 유튜버가 된 듯한 느낌이 좋았다. 아, 진짜 끝이구나. 시작부터 기대하지도 않아서, 이제는 기대하는 법을 잊어버린 나라서 끝조차 차분하지만 선수들이 없는 호주는 어쩐지 더 공허하다. 모두가 있는 한국으로 얼른 가고 싶다. 2주간 너무너무 고생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