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줏대가 없는 사람이었다. 왼손잡이지만 라켓을 쥐어주는 대로 오른손으로 배운 덕에 뜻하지 않은 스포츠 한정 오른손잡이었고, 집안 대대로 왼발잡이었지만 처음 공 차는 법을 배울 때 오른발로 배워서 발도 학습된 오른발잡이이다.
축구를 시작한 계기는 깜찍하기 그지없다. 옆집 살던 첫사랑이 축구를 좋아했고, 그 아이는 축구를 가르치는데 열정적이었다. 나는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그 집에 드나들었고, 축구를 함께 하며 지냈다.
엉성한 축구 기본기는 그와 함께할 때 많이 늘었지 싶다. 패스는 인사이드, 킥은 인스텝으로, 몸싸움은 거침없이 슈팅은 자신 있게. 그때 축구의 재미를 알아서 막연히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발야구할 때마다 아이들이 '네가 공을 찰 때마다 기대가 많이 돼.'라고 말해주는 것도 내가 인정받는 기분이라 행복했다. 다니는 학교에는 축구부가 없다는 상황에 축구는 글렀다 싶었다. 한 번은 아버지께 '축구선수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가 '100미터는 10초 안에 뛰어야 선수할 수 있다'라고 쐐기를 박힌 바람에 열등감으로 더 이상 운동선수는 못하겠다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뭐가 좋은 지도, 뭐가 싫은 지도 구분할 줄 몰랐기에 남들이 하지 말라는 것은 무작정 안 해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다.
2. 체육교육과를 오다.
체육교육과를 오게 되었다. 결과는 대대만족.
이 학과에 있으면서 4년 내내 행복했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란 스포츠라고 깨닫게 되어 몰입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그토록 꿈꾸던 선수생활(아마추어긴 하지만)을 시작했다. 어느 한 종목이나 똑바로 하라는 잡음도 있었지만, 좋아서 하는 운동에 그런 건 없다. 끌리는 운동을 지칠 때까지 신나게 하는 것. 내 삶이었고 낙이었다. 운동만 해도 졸업 조건이 채워진다니, 다양하게 해 보고 싶은 나에게 최고의 조건이자 이유였다. 같은 팀의 선수였던 체육교육과 학우들이랑 유독 든든한 관계를 맺을 수 있던 것도 모두 운동 덕분이었지.
축구도 내가 대학시절 선수로 뛴 여러 스포츠 중 한 종목이었다. 이 학교에 여자 축구부가 있다는 사실은 입학 전, 대학 소개글이 올라올 때부터 알고 반드시 들어가겠노라 다짐하던 차였다. 선배님은 고맙게도 입단 제의를 해 주셨고, 나는 기다린 티를 내지 않으려 담담한 척을 하며 그 팀에 들어갔다.
첫 해는 막내로서 경력은 적지만 열정은 인정받았다. 파주 NFC에서 열린 축구대회에서 나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다양한 포지션의 교체선수로 폭넓게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 팀의 연습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기에, 다소 중구난방의 나였지만 부지런히 뛰어다니면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한 넓이의 경기장이라 다채로운(?) 기용을 즐길 수 있었다. 멋진 언니들의 하드 캐리와 함께한 동기 선수들과의 협업으로 준우승을 했다.
두 번째 해는 자처한 축구부 주장으로 출전한 경기였는데 선수 모집과 훈련의 어려움, 학생회 활동도 겸임했기 때문에 많이 지쳤다. 겨우겨우 빌어야 연습에 한두 번 나올까 말까 하는 팀원들, 대거 은퇴해 버린 작년 선배들, 골키퍼는 아예 선수 모집조차 되지 않아, 내가 골키퍼 장갑을 껴야 했다.
이때 축구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 몸과 마음이 힘든 상태에서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빌고 빌어야 겨우 한 게임 만들어 갈 수 있다니, 비참했다. 더군다나 포지션도 내가 좋아하는 포지션이 아니라서 재미를 잘 못 느꼈다. 가슴 터지도록 뛰어다니길 좋아해서 축구가 좋은데. 어쩌면 가장 믿음이 필요한 자리에서 묵묵히 팀원들을 지지하라는 주장의 가장 멋진 역할이었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무겁기만 한 자리였다.
대회는 용케 나갔다. 교체 선수도 없이 발톱이 빠져라 뛰고 여러 군데 다친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대회 기간 중 의무 팀 지원을 받았는데 그분들이 선수 보호 차원에서 기권패하는 게 어떻나 물었다. 즐겁자고 하는 축구에서 건강을 잃어가며 경기를 뛰고 싶지 않았다. 기권 카드를 꺼내려고 하는 차에 '여기까지 왔는데 기권패하고 싶지 않다. 끝까지 경기 뛰게 해 달라.'라고 바라는 팀원들 앞에서 나는 그리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경기를 진행했다. 우리는 졌다. 마지막 경기도 져서 작년과는 달리 성적도 내지 못했지만 어쩐지 마음은 더 뜨겁고 아픈 대회였다. 축구 대회를 나가고 싶지 않아 졌다. 남자팀과 운영 갈등으로 축구 동아리에 환멸도 느꼈다.
다음 해에는 나는 축구를 안 하려고 다짐했다. 적당히 동아리 훈련 정도만 돕고 은퇴 선언을 하며 대회 출전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배드민턴 대회에서 다른 학교 친구를 사귀었다. 예전부터 내 배드민턴 경기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올해에는 인사를 하려고 용기를 내줬다. 그 친구는 축구를 좋아한단다. 나랑 비슷하게 축구 동아리 주장도 맡았다. 배드민턴에서 만난 것처럼 축구에서도 한번 더 나를 만나고 싶다 했다. 대회란 성적을 내야 하는 부담스러운 존재, 상대 팀은 오로지 나의 승패를 갈라줄 악역으로 생각하던 내게 처음으로 대회와 교류의 즐거움을 알려준 그 친구 덕에 다시 축구를 하고 싶어졌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친구는 대회 몇 달 전 부상으로 대회 출전은 하지 못하고 나는 세 번째 출전을 했다.
그 대회에서 축구와 사랑에 빠졌다. 조직력은 부족한 점이 여전히 많았지만 그래도 대회에서만큼은 여느 프로팀 못지않은 단합을 보여주는 아이들 덕분에 행복했다. 공격수로 뛸 수 있어 골도 넣고 즐거웠다. 거친 경기 후에 진심으로 사과하는 상대팀, 서로의 실력을 칭찬하는 그 자리에서 축구가 주는 행복을 깊이 느꼈다.
이 대회 후로 나는 축구를 잘하고 싶어졌다. 부상으로 한창 열정이 불타올라도 영상을 보는 정도로만 만족해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축구를 공부하고 하면 정말 재밌는 거구나. 숨이 차게 뛰는 재미만 있는 게 아니라 한 골을 위해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름다운 거구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