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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람 Sep 06. 2023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여자축구

같이 공 찰 사람 없어도 혼자 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너는 백 날 연습해도 안된다’ ‘여자가 무슨 축구냐?’ 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혼자서 열심히 공 차고 있으면 구경하던 남자들이 이렇게 거슬리는 말을 지껄이고 갔다. 남자 선수들은 강의에 나오는 기술을 잘 쓰던데 나는 완벽하게 기술을 구사하진 못했다. 이게 바로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가, 정말 여자는 축구를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는 경기는 남자 프로 경기는 물론 내 경기도 다시 찾아보지 않을 정도로 승부욕도 심하고 좌절을 이겨내길 못하는 나였다. 종종 들려오는 여자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의 소식은 마음이 저려서 경기를 찾아볼 생각도 안 했다. 


 그러다 이금민 선수의 이적 소식이 들려왔다. 이금민 선수는 2019, 4월 아이슬란드 소집 때 인사이드 캠에 등장해서 이름을 알고 있던 선수였다. 종종 인사이드 캠에서 나오는 영상이 무척 재밌었다. 사진마저 재밌었다. 웃긴 사람이거든. 지소연 선수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우울증이 심해 고통스러웠던 하루에 이금민 선수는 유일하게 내가 소리 내서 웃는 이유였다. 2019년 월드컵에서 유일한 득점이던 여민지 선수의 골을 어시스트했다는 뉴스를 보고 내가 아는 선수가 축구도 잘하는 갑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맨시티로 이적한단다. 간사하게도 나는 이 선수를 잘 아는 것도 아니면서 마치 그 진가를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이적 소식을 반갑게 여겼다. 내가 재밌어하는 사람이 유명 빅클럽에 들어간다.

 뉴스가 나오고 며칠 후, 나는 공부가 하기 싫어 저녁에 딴짓을 했다. 노트북으로 유튜브를 틀었다. 이금민 선수의 고별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는 wk리그 경기가 4게임 중에 한 게임만 중계되던 때였는데 마침 이금민 선수의 경기가 중계되는 날이었다. 여자축구는 충격적이었다. 충격적이게 아름다웠다. 볼 터치가 말도 안 되게 부드럽고 패스가 매우 정확했다. 받는 사람을 제대로 배려한, 발밑과 공간으로 보내는 패스들이 모두 예술이었다. 그런 것들을 경주는 모두 유효 공격으로 이어가는데 선수들 하나하나의 이타적인 플레이가 느껴졌다. 이금민 선수의 해트트릭도 감동 포인트 중 하나. 그리고 보은 상무, 짧은 패스로 압박을 풀어 나오는 게 너무나 아름다웠다. 다들 자기 팀 선수들이 어디로 올 지 한 수 내다보고 패스를 하는 것도 놀랍고 신체의 다양한 부분을 사용해서 원하는 곳에 창의적으로 보내는 것도 좋았다. 권하늘 선수의 노련하고 야무진 플레이에 넋을 놨다. 무엇보다 남자들만 사용하는 줄 알았던 팬텀, 턴, 발리슛 같은 여러 가지 축구 기술을 여자 선수들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걸 보고 나는 소름이 돋았다. 축구란 몸을 움직이고 공을 다루는 것에 불구한 건데, 저 공을 잘 다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 그들인데, 이만큼 잘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녀로 나눌 일이 아니라 축구에 얼마나 진심이고 노력을 들였는지 물어볼 문제였다. 몸싸움은 거칠었다. 모두가 부서져라 내달리는 열정의 전장, 그들은 90분 동안 최선이고 최고였다. 내 고지식하고 답답한 고정관념을 단 한 경기로 깨 주었다. 유기적인 패스와 아기자기하고 정확한 기술을 보여주는 여자축구는 바로 내가 찾던 아름다운 축구였다.

 아 이제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게 되었다. 남자 축구는 천천히, 여러 가지 이슈들로 나의 정을 떼가던 중이었다. 그 마음과 정은 당연하게도 여자축구로 향했다.


 아름다운 여자축구를 알게 되어 행복했냐고? 웃기게도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내 후회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나도 축구 선수를 했다면 저렇게 아름답고 재밌는 축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이금민 선수처럼 멋진 선수들을 알고 나도 따라서 해외 빅클럽에 진출하는 꿈을 꿨을 텐데. 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솔직하지 못했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공 차는 거 좋아하잖아. 부모님의 한 마디에 그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나는 왜 그리 용감하지 못했을까? 아, 공부 잘하면 뭐 하니. 결국 진짜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오히려 공부가 내 발목을 잡아버리는데. 부모님 입장에서 자식이 살았으면 하는 삶을 살자고 다짐한 게 잘못되었다. 결국 이건 부모 입장에서 자식이 살았으면 하는 삶이지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아니었잖아. 후회스럽다. 자기가 하고 싶은 축구를 하는 선수님들이 질투 난다. 열심히 하면 후회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후회스럽다. 무엇을 위해 나는 몸과 마음을 갈아가며 공부했나?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혐오가 나를 잡아 삼키려 할 때 글 한 쪽을 봤다. 여자축구 팬 카페에 들어가서 이금민 선수의 초등학교 동창이 남긴 글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방과 후에 남아서 한참 프리킥을 차던 금민, 그렇게 노력하더니 해외 이적까지 하게 되어 정말 축하한단다.'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를 알게 되어 기쁘다. 한편으로 나는 축구를 아무리 좋아해도 그와는 상관없는 진로가 결정된 사람이다. 발목 잡히기 싫어서 열심히 한 공부인데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기에 공부로 승부를 봐야 하는 사람이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없게 되었다. 솔직히는 삼을 용기가 안 난 거겠지. 스포츠 관련 직업을 생각해보려 해도 지금껏 쌓아온 성을 무너뜨릴 용기가 나지 않는다.

 금민 선수님은 자기가 한 선택에 책임감을 가지고 아주 어릴 적부터 꾸준히 노력을 해왔던 거구나. 그렇기에 그 결과를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받고 있고. 나는 취업 시험이 의미 없다고 여기며 오늘 할 공부도 미룬 채 이금민 선수 덕질만 하네. 지금 해야 할 일을 실컷 제쳐두고 남이 이룬 성취만 바라는 내가 감히 그를 부러워해도 되나? 오히려 팬이라 하기에 부끄러운 사람이 아닐까? 아, 열심히 하는 건 후회를 안 하는 정답이 아닌데 나는 열심히 후회를 막으려 당연히 안 되는 거구나. 공부를 하고 그 사이에 내가 한 노력들을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걸로 버리려는구나. 이제 와서 실업팀 선수를 꿈꾸는 건 올바른 선택도 아니다. 너무 늦어버린 지금 지나가버린 꿈으로 남은 세월과 지난 세월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건가. 아, 나는 늦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제대로 사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나는 지금 축구 선수는 되지 못하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다. 얼마나 멋진가, 어린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솔직하게 답하고 반대에 부딪히고 힘든 일도 많았을 텐데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며 묵묵히 해온 사람들이다. 나는 가끔 듣던 ‘여자가 뭔 축구냐’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그들은 수없이 들어왔을 테다.

 그런데 굽힘 없이 축구를 하고 있다. 여자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축구를 할 수 있단 걸 세상에 알려줘서 너무나도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나 대신 용기 내서 축구를 하고 그 꿈을 이룬 사람임을 생각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보답하고 싶다. 나는 축구 경기를 직접 뛰어서 돈을 벌지는 못해도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어 축구 선수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나는 축구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 축구를 여자아이들에게 전하고 아이들에게 여자도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자립이 필요하고 이 취업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가슴이 뜨거웠다. 얼얼하니 목이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신나는 건가.

저 날 이후로 여자축구 선수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경기 영상을 찾아보다가 문미라 선수님을 알아버렸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축구를 한다고? 이 분은 팬들과 소통도 자주 하시는 거 같아 마음이 갔다. 호날두 아저씨는 사랑한다해도 절대 모른 척 하던데. 웃는 모습은 뭐 이리 귀여운지, 사진을 보면 너무너무 귀여워서 자꾸 웃음지었다. 공부 제대로 한답시고 핸드폰도 정지했다. 다만 노트북에 저장해 둔 사진만 쳐다보며 지냈다. 시험 치기 2주 전, 좋아하는 마음을 도저히 못 참고 문미라 선수님께 장문의 사랑고백을 보냈다. 당신을 제가 정말 좋아해요. 미라 선수는 답장도 해주시고 맞팔까지 해주셨다. 이 멋진 사람들은 팬들도 소중히 여긴다. 더욱이 이번 챔피언 결정전은 시험이 끝나고 이틀 뒤다. 나는 웃으며 문미라 선수님과 다른 선수님을 뵙고 싶다! 성적이 엉망이어서 우울하게 보고 싶진 않다. 오로지 시험 결과는 내 기분을 망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목표와 희망으로 나는 매번 과락을 맞던 모의고사와 달리 본 시험에서는 매우 고득점으로 시험을 통과하고 목표대로 문미라 선수님을 가벼운 마음으로 뵈러 갔다. 그리고 지금은 여자축구를 마음껏 즐기고 응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또 다른, 더 큰 꿈을 가지고 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여자축구. 나는 여자축구로 내 삶을 구원받았다. 무엇보다 내 심장을 뛰게 할 사명을 만났음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계속 여자축구라는 삶을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려 한다.


이전 15화 내 온 시선과 마음과 열정을 가져가요,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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