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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람 Aug 26. 2023

세 번째 브리즈번 일기, 나는 당신들을 사랑한다.

8.3. 세 번째 경기, 대한민국 vs 독일

알람도 없이 7시에 일어났다. 출근하던 때의 루틴으로 돌아왔다. 나도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 하루 이틀의 피로에 생활 리듬이 완전히 무너지진 않는다. 경기 보러 갈 것만 생각해서 일정을 아무것도 안 잡았더니 좀 심심하다.

 핫플 하나쯤은 가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한 카페를 갔다. 핫초콜릿이 정말 녹진하니 맛있다던데 그다지 진한 느낌은 없었다. 딱 이름났지만 막상 가보면 별거 없는 핫플 느낌. 피로가 쌓이니 좀 비관적이게 생각한다. 등지고 앉은자리에서 한국어가 들려왔다. 오늘은 문미라 선수님 유니폼을 입고 있는 데다 머리도 묶고 있어 '문미라' 세 글자가 훤히 보일 테다. 쑥스러워져서 한 시간 정도 앉아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 먹으려고 토스트 기를 돌리는데 갑자기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난 내가 잘못한 건 줄 알고 굉장히 당황했다. 다른 방도 난리인가 싶어 나왔는데, 이런, 열쇠와 핸드폰을 방에 두고 방문이 잠겨버렸다. 당황은 잠시다. 아래층에 내려가서 키를 두고방 밖으로 나와버렸다고 했다. 지배인 느낌이 낭낭한 아저씨는 친절하게 키를 하나 더 내주었다. 화재경보기는 잘못 울린 거 같은데 혹시 불안하면 로비에 좀 있다 가라고도 한다. 음 괜찮아요. 전 빵을 먹으러 가야 하거든요. 그리고 내 새끼 같은 아이패드랑 일기장을 두고 혼자서만 안위를 챙길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으로 혼란스러웠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브런치를 즐겼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긴 아쉬워서 또 스타벅스를 왔다. 스타벅스 진짜 최고다. 호주 스타벅스 인기 없기는 개뿔. 앉을자리 없이 빽빽하다. 겨우 한 자리 차지하고 전부터 하고 있던 글쓰기 챌린지를 위해 글을 정리하고 다시 써넣었다. 출판 일정을 알 수 있을까 싶어 신청페이지에 다시 들어갔는데 챌린지 주최자가 예전에 쓴 글 복사 붙여 넣기라 던지, 당일날 안 쓰고 미뤄 쓰는 건 자제해 달라고 했다. 미안한데 그 모든 걸 다하고 있었다. 에라 몰라. 해주든지 말든지. 그래도 글 쓰는 게 재밌다는 걸 알게 해 줘서 고맙다.

 저녁도 야무지게 챙겨 먹고 걸어서 경기장으로 향했다. 걸어갈 만한 거리라니! 축복받은 위치에 숙소를 잘 잡았구나. 우리나라 국대 유니폼을 챙겨 입은 한 분이랑 눈이 마주쳤는데 내가 냅다 인사를 했다. 굉장히 오래된 축구 팬이셨다. 알고 보니 내 인스타 팔로워기도 하셨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지금까지 있던 이야기를 말하고 듣고 했다. 걸어가는 동안 참 재밌었다. 대학생의 패기로 혼자서 당차게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같이 앉아 보고 싶었지만 티켓 배치가 달라 따로 앉았다. 돌아갈 때 같이 가자는 내 말에 흔쾌히 들어준다. 호주에서 축구 친구가 생겼다!

오늘도 우리 문미라 선수님 나오게 해 주세요

우리 멋진 효주 선수. 효주 선수는 원래 공격수인데 콜린벨 감독체제에서는 꾸준히 수비수로 활동하고 있다. 활동량을 보면 어마어마할 정도인데 지소연선수에 의하면 그리 지치지도 않는다고. 많이 달리고도 안 지치는 게 강아지 같아서 귀엽다. 대단한 건 당연하고. 귀엽게 양갈래 머리를 땋은 게 인상적이었는데 오늘은 심플하게 하나로만 묶었다.


경기는 좋았다. 피파 랭킹 2위를 상대로 아찔한 순간들이 많았고 독일 선수들의 볼터치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는데 대한민국의 골망을 쉽사리 흔들진 못했다. 이영주 선수의 예쁜 패스를 받아서 조소현 선수의 골! 조소현 선수가 많이 힘들어 보여서 이번에도 선발인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던 난데 역시 선수 걱정은 쓸모없단 걸 느꼈다. 알아서도 참 잘하는 사람들이네. 플레이 메이커로 늘 기대가 되던 영주 선수는 돌아오자마자 이타적인 플레이로 귀중한 한 골을 선물한다. 지난 경기에서 이영주 선수님이 그리웠던 나, 소원을 풀었다. 나는 이 골이 너무나 우리 선수님들답게 팀원을 생각하면서도 당찬 마무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연계 플레이어서 눈물이 났다. 내가 이 한 골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마지막 한국 돌아가는 길 미련 없도록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었다. 수비에서 협심이 아름다웠다. 지소연 선수는 이번 대회 내내 내려앉아서 센터백 수준으로 경기를 했는데 그 덕에 더욱 밀도 있는 수비를 잘했다. 종종 올라와서 역습을 하는 것도 지소연 선수의 클래스를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심서연 선수도 오늘 완전 신들렸다. 클리어링부터 몸싸움까지 대단했다. 김혜리 선수는 제2의 골키퍼. 오늘 수비 진짜 빛이 났다. 추효주 선수의 몸을 내던지는 수비. 태클이 이렇게나 깔끔하게 들어갈 수 있단 걸 효주 선수가 보여줬다. 공수 벨런스 미쳤다. 김정미 선수는 오늘의 M0M. 볼 처리를 모두 안정적이게 하며 실수 하나 없이 든든히 골문을 지켰다. 앞에서 같이 경기를 보던 호주(? ) 사람이 '왜 코리안의 골키퍼가 MOM이 아니야? 이해할 수가 없네! ' 이러더라.


우리 미라 선수는 3경기 모두 투입되었다. 콜린벨 감독 체제에서 유독 힘들었던 사람이다. 소속팀에서 갈리고 대표팀에서 부서지던 그런 사람이었다. 골 냄새를 맡는 센스는 탁월했지만 항상 그 끝은 상처뿐이어서 내가 이번 대표팀을 많이 걱정하고 감독님을 미워하는 이유기도 했다. 걱정과 달리 이 중요한 무대에서 존재를 뽐내주었다. 내가 4년 전에 제대로 당신을 알지 못해 아쉬웠던 그 속상함을 이번 3경기로 모두 날려주었다.

경기가 끝나고 이기면 울겠다는 다짐과 다르게 인사하러 다가오는 선수들을 보니 눈물이 또 났다. 4년을 당신들만 바라보며 살았다. 어떤 길을 걸었는지 지켜보고 마음 다해 응원했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를 받아 드는 당신들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볼 방법은 없겠지만 저마다 속상함, 후련함을 느끼고 있으리라. 누구도 쉽게 생각 못한 마무리를 보여주는 그 모습, 포기 않고 온몸 던지는 그 모습이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그전 경기는 왜 이렇게 안 했냐고 캐묻는 사람이 있을까? 그 두 경기도 당신들은 최선이었을 거다. 그렇게나 예쁘게 공을 보내던 사람들이, 터치 하나 허투루 하는 법 없던 사람들이 잔뜩 지쳐서 공을 처리하는 걸 나는 보았고 마음 아팠다. 이번 경기는 간절함이 모여 만들어낸 기적이지 결코 당연하게 가져올 결과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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