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25.
드디어 첫 번째 경기를 보러 가는 날이다. 월드컵, 그 대단한 경기를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대한민국은 오늘 어웨이로 붙는 경기다. 나는 개의치 않고 홈 유니폼을 입었다. 이번 대장님 배번도 12번이어서 이름 없는 유니폼이지만 우리 문미라 선수님 유니폼인게 티가 나서 좋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티 날 것도 없이 이건 문미라 선수님이 친선전에서 날아다니실 때 입으셨던 실착 유니폼이다. 나는 아까운 마음보다는 함께하고픈 마음으로 유니폼을 당당히 입었다. 내가 이걸 월드컵에서 입다니.
시드니 축구 경기장에 도착했다. 축구장에 살다시피 하는 나라서 설레는 마음은 잘 들지 않았다. 그런데 찬 공기와 은은한 잔디 냄새는 내 첫 직관이던 11월의 인천 구장을 떠오르게 했다. 오랜만에 두근댔다. 내가 월드컵을 다 와본다. 세상에나. 나의 여자축구 입덕은 2019 월드컵이 끝난 직후라서 너무 아쉬웠던 기억이었거든
라인업의 순간. 모두가 애국가 앞에서 하나 되었다.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월드컵에 온 걸 실감하고 내가 여자축구에 빠지게 한 이금민 선수가 여기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으며 눈물이 났다. 와앙 여기가 월드컵 경기장이네! 진짜 월드컵이야.
후반 5분 남기고 문미라 선수님 투입 준비를 한다. 마음에 큰 요동도 없이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힘든 시간 동안 혼자 견딘 게 대단해서일까,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 속에서 결국 확신의 성공을 만들어 낸 게 대단해서일까, 아니면 결국 문미라는 ‘축구’하는 사람임을 깨달아서일까.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냥 울었다. 이 기쁜 날 혼자 울었다.
문미라 선수님을 알게 된 때부터 선수님은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대표팀 에이매치에서 만나요.’라고 편지를 쓰던 내가 ‘경기 마치고 두 발로 걸어 나와 저랑 인사해주시는 게 최고의 경기랍니다.’라고 고쳐 쓰는 건 바로 그 다음 편지부터 그랬다. 경기를 하다가 의식을 잃고 실려 나오는 날도 있었고 국가대표 최종명단 발표 직전, 부상으로 인한 소집해제를 한 두 번 본 게 아니라서 당신의 경기를 볼 때면 걱정하는 마음이 컸다. 부서질 대로 부서진 사람을 크게 망가지게 한 게 2022년 6월, 십자인대 파열 부상이었다. 그날 경기를 나는 보러 갔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보면서 축구가 혐오스러웠다. 축구를 계속할지 말 지 고민하는 선수님께 나는 더 이상 축구를 계속해 달라고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축구하는 당신이 좋지만 축구가 소중한 당신을 힘들게 하면 그건 의미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계속 하셨다. 부상을 이겨내고 필드에 복귀한 것만 봐도 기적 같은데 대표팀도 다시 돌아오셨다. 부상으로 소집해제되었던 지난 다른 날과 달리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도 당당히 승선했다.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꿈같은 날은 오늘이었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은 나를 울게 했다.
경기는 아쉽게도 패배였다. 아쉬움. 아쉬웠을까. 더 깊이 생각하다간 결과에 휩쓸려버릴 거 같아서 생각을 얼른 접었다. 그냥 경기를 직접 본, 눈이 시리던 그 감격을 오래 곱씹고 싶었다.
혜리 선수 팬을 호주에서 만났다. 태극기 타투스티커도 나눔 해주시고 유창한 영어로 소통도 도와주셔서 참 감사했다. 미국 여자축구의 오래된 팬이셔서 지난 월드컵도 직관하셨다. 세상은 넓고 여자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 괜히 뿌듯했다. 내가 뭐라고. 언니가 선수들의 정보를 주는 한 팬 계정에 너무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했다. 아무래도 여자축구에 대한 홍보나 컨텐츠가 적어서 바쁜 팬들은 이런 소식들이 고마울 것만 같았다. 나도 팬들에게 선수들에 대한 정보와 재미를 줄 수 있는 그런 소식지를 만들어 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내 소중한 운동화가 한국에서 출발하는 날 비를 맞아서 썩어버렸다. 그래서 거실 슬리퍼로 시드니를 돌아다니다가 이건 좀 아니다 싶어 호주 구제샵에서 5불짜리 운동화를 샀었다. 신발을 버린 사람이 왜 버렸는지 생각해 볼 걸. 그 신발을 신으니 발이 진짜 너무 아파서 신발 가게만 찾아다녔다. 백화점 비슷하게 생긴 마켓을 찾았다. 대한민국 컨셉의 신발 발견. 한국에서 파는 걸 못 봤는데, 호주에서 한국 국대 디자인 신발은 안 팔려서 반값 할인 중이었다. 냅다 사버렸지 뭐야. 좀 더 예뻤다면 인기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저건 잘 모르겠다. 정 많은 코리안인 나는 샀다. 안녕하세요 초코파이입니다.
달링 하버에 피파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충격과 공포의 굿즈샵. 대부분의 굿즈들이 눈물 나는 디자인에 눈물 나는 가격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기 굿즈가 없었다. 충동적으로 가게를 부술 뻔 했다. 이왕 여자월드컵을 개최했으면 잘 좀 해보지. 적어도 본선 올라온 팀들은 다 있어야 할 거 아냐. 세상에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자문을 조금이라도 구했다면 좋았을 텐데. 요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축제에 대단히 성의 없는 디자인으로 기절할 거 같았다. 여자축구의 매력을 알릴 더없이 좋은 기회인데 말이다. 하다 못 해 나한테라도 물어보지! 나는 돈도 안 받고 이야기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여자축구는 팬 층이 좁은 대신 깊다. 그런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게 준비하면 돈도 많이 벌고 충성도 높은 팬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어쩌면 팬 층도 점점 더 넓힐 수 있을 텐데. 좁다고 해서 대충 대접하는 이 현실이 좀 아쉽다. 축구와 예술의 합작, 더 많은 사람에게 서로의 장르를 알릴 기회. 나중에 내가 구단주 하면 그렇게 해야지.
이대로라면 성인병이 머지않은 식단에 건강 챙겨보려고 계란이랑 시금치 샀다. 풀숲에 낳아둔 알처럼 생 시금치에 덩그러니 삶은 달걀 두 개 올려둔 게 웃기다. 저거 얼마게? 내 기억으로는 한 통당 4000원 가까이했다. 정신 나간 듯한 물가지만 패스트푸드 식당 가는 것보단 낫다고 위안하며 맛있게 먹었다. 생 시금치 풀잎을 씹는 건 나쁘지 않았다. 시금치나물의 참기름 냄새가 아니라 진짜 시금치의 맛을 느끼니 낯설었다. '잘게 찧은 시금치 향이 코에 스몄다.'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외국 소설 문장 같은 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