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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람 Aug 16. 2023

세 번째 시드니 일기

7.26

 이번 여행은 사실 경기를 제외하면 다른 일정을 따로 잡진 않으려 했다. 왜냐면 지금 글 쓸 거랑 그림 그릴 거 한참 밀렸거든. 가만히 경치좋은 카페에서 글 쓰고 호텔에서 쉬고 싶었다. 근데 옵저버토리 공원도 좋다 하고 시드니가 워낙 유명한 도시인데 아무 데도 다니지 않으면 후회할 지도 몰라 나갈 준비를 했다. 옷은 역시나 유니폼. 셔츠 위에 입어봤다. 인스타그램에 보면 유니폼 예쁘게 잘 입는 언니들 많던데 나는 어째 그런 모양새가 안 나온다. 차라리 운동할 때 입는게 더 잘 어울릴 듯. 한글 적혀있어서 그런가 중국인이냐고 묻는 건 없어서 좋았다. 다만 지나가는 한국 사람들이 쳐다보는 거 같아서 좀 쑥스럽다. 누가 수원특례시라고 읽는 거 들었다. 그래도 당당히 걸으려고 했다.

 지독한 축구 여행 컨셉러인 나는 읽는 책도 축구 책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좋았던 책. 선수님이 살아온 축구 삶을 살펴보는 것도 좋았고 축구 선수들의 루틴이나 생활들을 엿볼 수 있다. 지소연 선수의 눈에 비친 다른 선수들의 마음, 그리고 다른 선수들 눈에 비친 지소연 선수. 모든 게 재밌었다. 어딜 가서 그런 솔직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직접 말하는 건 쑥스러울거라 생각이 들었지만 책에서는 그런 기색 없이 자세하게 풀어내셨다. 팬들 입장에서는 그저 반갑고 귀여운 이야기 들이다. 선수님들 책 좀 내주세요! 문미라 선수님의 삶도 멋진 이야기가 많던데 다음에 책 한 번 내주셨으면 좋겠다. 축구를 할 때 어떤 생각으로 터치하고 패스를 하는지, 공격은 어떻게 하는지 수비는 어떻게 하는지, 공은 어떻게 막고 빌드업하는지 포지션별로 생각을 써주셨으면 좋겠다. 경험으로 알려주는 글을 쓰면 후배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나도 재밌게 볼 수 있을 테고. 


 공원 잔디밭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 아는 척을 해왔다. 리플라 대표님이 문미라 선수님 이름을 보고 반가워서 말을 걸어주셨다. 멋진 카메라를 들고 계셨는데 유니폼을 입은 내 모습을 찍어주신다 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우리 대장님 이름을 아는 사람을 보다니 너무 뿌듯했다. 더 이상 '나의 미라'가 아닌 우리의 미라'가 되는 거 같아서, 미라 선수가 더더욱 유명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팬이라 기분이 좋았다.

시드니 시립 미술관인줄 알고 갔는데 아니었고 그 주변의 다른 사설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구경했다. 다만 영어로 설명이 쓰여 있는 데다 작품들도 대부분 현대미술(의도를 알기 려운 그림과 조형이란 뜻)이라서 조금 재미없었다. 이런 거 보면 우리나라 사진 찍기를 목적으로 한 전시회가 오히려 친절하고 재밌는 곳이란 생각이 든다.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 설명을 읽어보지 않아도 그림을 느낄 수 있고 추억 속에 담고 싶은 아름다움이 가득하잖아? 물론 이 작품들도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었겠지만 나는 호주 사람이 아니라 그런가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기념품 상점은 양말을 음식 모양으로 말아서 파는 게 재밌었다. 가격이 미쳐버려서 살 엄두는 못 냈지만.

 2층에 올라가니 모든 성을 위한 화장실이 있다. 이 화장실을 원치 않으면 다른 층을 쓰라고 친절히 알려준다. 세상에는 다양한 성이 있다. 여기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듯하면서도 존중이 가득하다. 그걸 제대로 확인할 수 있던 신기한 화장실이었다. 이 미술관에서 본 것 중 가장 재미있었다. 옆에는 가족 화장실이어서 자녀들을 데리고 온 부모가 아이의 성별과 상관없이 쓸 수 있게 했다. 신기해.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아버지가 딸을 돌보기 위해, 아니면 엄마가 아들을 돌보기 위해 화장실을 써야 할 때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그 마음도 잘 헤아리고 있다.


7.27.

 오늘은 공원에서 햇빛을 쬐고 싶어서 반팔만 입고 패딩을 껴입었다. 여기는 날씨가 참 좋다.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가면 쌀랑한 공기에서 가을 냄새가 난다. 겨울이지만 시베리아 한반도 북어에게 이 정도는 선선한 가을, 아니 초봄의 느낌이다. 그래서 문을 열면 너무 설레. 더욱이 혼자 여유롭게 카페 가서 놀 생각 하니까 두근댔다. 어떤 사람은 패딩을 입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어떤 사람은 반바지 차림으로 러닝 한다. 내가 축구 유니폼을 입어도 호주인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재밌다 여기. 

샐러드와 딸기로 야심 차게 피크닉을 꿈꿨으나 1회 용품을 호락 호락하게 내주지 않는 호주라서 샐러드는 먹을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손으로 집어먹기엔 배짱이 좀 부족하다. 서성이는 호주 따오기랑 다른 새들이랑 딸기를 나눠 먹고 나는 사진도 찍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볕에 가만 누워있는 게 이렇게나 편안하고 좋은 일일 줄이야. 나는 날씨 좋을 때 밖에서 드러눕는 걸 좋아한다. 평화롭고 조용한 호주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내 영어 실력에 자신이 없어져서 마음을 접는다. 영어 실력은 핑계고 새로운 환경에 다시 적응할 자신이 없다. 나는 안정을 굉장히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오, 스스로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7.28.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져서 집에만 있었다. 커피를 내려서 하루 종일 글만 썼다.  풍경과 함께하니 아픈 몸이 좀더 낫는 기분. 저기 옆에 조그맣게 보이는 과자는 아노트의 쇼트브레드 샌드인데 진짜 맛있다. 드립 커피랑 같이 먹으면 천국이다. 탁 트인 풍경과 멋진 커피. 건물들 사이로 솟은 나무가 덩어리 진 게 귀엽다. 그나저나 호주는 정말 산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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