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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람 Aug 20. 2023

두 번째 애들레이드 일기, 축제의 월드컵에서 혼자 다급

전날 효주선수 생일이라 추니폼을 입고 길을 나섰다. 경기장 가는 버스를 타는 정류장에서 얼굴 전체에 태극무늬칠을 한 사람을 봤다. 나도 안에 유니폼을 챙겨 입긴 했는데 그 사람은 대단했다. 버스를 탈 때 그 어느 날보다 확신이 느껴지는 여정이다. 그런데 버스가 구글 지도 경로와는 다르게 간다. 알고보니 월드컵 교통 통제 때문에 원래 노선과 다른 곳으로 돌아간다. 당황한 한국인들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 와중에 헤매는 눈동자들이 조금 웃겨서 속으로 웃었다.

그나마 제일 가까워 보이는 역에 다 같이 내려서 바삐 걸었다. 매진된 경기라 그런지 관람객들이 엄청났다. 짐 검사를 하는데 손에 가득 들고 있는 짐은 운동장 안에서 선수들에게 줄 수 없다며 물품 보관소에 맡기게 하더라. 선물 주려면 호텔 가서 만나란다. 호텔 쫓아가면 만나게 해 주나요? 더 놀랍다. 우여곡절 끝에 킥오프 직전에 경기장에 들어갔다. 부지런히 걸었더니 좀 더워져서 패딩을 벗었다. 추효주 선수 이름이 훤히 보이니 한 기자님이 말을 걸어오셨다.


'수원도시공사 유니폼을 가질 정도라면 상당히 오래된 팬인데 여기 교민이신가요?

아뇨.


'그렇다면 설마 이 경기를 위해 찾아오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 월드컵 하나만 바라보고 호주를 왔어요.


지독한 내 대답에 기자님이 좀 놀란 듯했다. 축구홀릭 여행싫어인이 8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려면 이런 축제말고는 없죠. 뭐 어쨌든 인터뷰도 하고 첫 경기에서는 중계도 타고 출세했다 이람.


 이번 경기에서는 문미라 선수의 하프타임 교체, 천가람, 전은하 선수의 월드컵 데뷔전, 귀여운 선수들의 몸 푸는 것도 가까이서 봐서 좋았다. 꽉찬 관중석도 경기 보는 흥을 더 끌어올려줬다.

 다만 경기는 졌다. 경기 끝나고 선수들 인사할 려도 없었다. 퇴근길 주변에 다가가려 하면 경비원이 저리 가라고 해서 구경조차 힘들었다. 멀찍이 서서 몇몇 선수들이랑 인사를 나누긴 했다. 침울해보이는 그들을 차마 불러세울 수 없었다. 지소연 선수만이 유일하게 다가와서 선물을 모두 받아가 줬다.

 져서 미안하다는데 참내, 선물을 일찍 못 준 게으름 피운 못난 팬인 내가 더 미안하다. 질 수도 있는 거지. 시무룩한 선수들이 안타까웠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이 시간을 보내온 줄 아니까 더욱 안타깝다. 그들이 세상에 알려질 기회를 잃었다는 게 안타까웠다. 악플러들이 물어뜯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불쾌했다. 나도 덩달아 침울해져서 말을 줄이며 있었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 트램을 타고 첫 번째 정류장에 왔다. 희한하게도 트램은 버스처럼 내가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가만히 멍 때리고 있던 나는 길을 놓칠 뻔했다. 조금 늦게 눌렀지만 친절한 기사님은 문을 열어주셨다.

 우리 집으로 가는 버스는 30분마다 한 대씩 있어서 한참 또 기다려야 했지만. 씩씩한 엘리스는 할머니 댁으로 혼자서도 잘 간다. 버스를 타고 터덜터덜 걸어서 우리 집에 왔다. 주변에 식당이라곤 없어 막막하던 중에 겨우 챙긴 햇반을 떠올렸다. 된장국 블록을 반을 나눠 머그컵 두 개에 나눠 담았다. 햇반도 반씩 덜어 머그컵에 담았다. 뜨거운 물을 끓여 붓고 깻잎장아찌 캔을 뚜껑 삼아 덮었다. 다행히도 밥이 익더라. 찹찹 두 컵을 먹고 나니 정신이 좀 든다. 늦은 첫끼를 슬픈 마음으로 먹었다. 

 나보다 더 상심일 선수들을 위해 인스타그램에 짤막하게 글을 올렸다. 선수들은 당일날 바로 시드니로 돌아간단다. 공항에서는 모로코 선수들과 같이 있는데 아주 노래를 부르고 염병이 났다. 매너도 없는 녀석들. 대표팀 선수들은 많이 지쳐 보였다. 특유의 세밀한 터치와 패스를 아무것도 활용하지 못했다. 그 모든 게 고강도 훈련 탓인 거 같아서 감독이 미웠다. 이 고강도 일정 속에서 엔트리 변화는 크게 없이 하나로만 밀고 나간다. 대표팀 선수들은 모두 소속팀에서는 주전인데 그 기량을 유지하려면 대표팀에서도 꾸준히 주전으로 쓸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합이 잘 맞는 조합을 두 팀으로 구성해서 경기마다 판을 새로 짜서 쓰는 느낌이면 선수들 건강 관리와 경기력 유지에도 도움 되지 않을까? 오늘도 입축구 달인은 혼자 넋두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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