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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라 Dec 17. 2018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제주살이 백 나흘 181216

어제 여미지 식물원 갔다가

서귀포에서 카페하는 언니네 집에 놀러감.


마침 바닥 공사 중이라 카페가 쉬어서

늘 바쁜 언니와 천천히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다.


언니네 카페에 수공예 기념품을 팔고 있는데

위탁 판매 해줄테니 만들어 오란다.


신바람 나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집에 돌아와 오늘 뭘 만들어 볼까 생각 했더니

동백리스 만들던 생각이 난다.


펠트지로 간단하게 동백 꽃을 만들어

마그넷 제작.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예전 기억이 떠 오른다.




손재주가 좋고

뭐든 만들기 좋아하고,

쓸모있는 물건을 만드는 것을 워낙 좋아했다.

모자, 가방, 옷, 파우치 뭐든 만드는 것이 재밌었다.

허술해도 내가 만든 것을 쓰는 재미가 있었다.


내 것을 만들다가 남의 것도 만들기 시작했다.

( 원시 시장의 원리가 바로 이것 아니던가!)


쓸모 있는 물건은 주인을 찾아 가는 법.

동대문 원단시장에서 원단 끊어다 슈슈에 머플러 세트 만들어 팔기도 하고.

대학로에 좌판을 열면 자기네 가게에도 물건 넣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천연비누 처음 나올 때 비누도 만들어 팔고

(내가 쓰려고 만들었는데 선물용으로 몹시 잘 팔림. 그땐 천연비누 한 장에 만원씩 팔릴 때다.)

헬로 키티로 유명했던 산리오 코리아에 캐릭터 상자를 만들어 납품하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뭐든 만들면 술술 잘 팔린다.



종이 공예, 은 점토 공예로 활발한 강사활동을 하며

교육장을 내고, 수공예 장신구를 제작했다.

인사동에서 수공예 장신구 전시회도 했다.

홍대 플리마켓 초창기에 셀러로 참여하기도 했다.


수공예 장신구점에 위탁 판매 하다가,

급기야 교육생들과 다른 강사들 몇 명과 동업해서 수공예 장신구 전문 매장을 내기도 했다.

(무려 압구정에  ㅋㅋ  )



열심히 만들었지만 일을 크게 키울 수록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였다.

재료가 산더미 처럼 쌓였다.

(비싸서 버리지도 못한 재료가 아직도 우리집 창고에 쌓여 있음. 동대문, 남대문 부자재 상가, 종로 금은방 뒷쪽 골목의 재료 상가들을 구석구석 쑤시고 다닌 결과물들.)

직접 만드는 수공예품이니 하루 죙일 만드느라

힘들었다.


그렇게 바쁘면 돈이라도 많이 모으면 좋았으련만!

샘플 제작하고, 만날 재료 사다 나르고, 밥 사먹고, 납품하러 다니느라 길에다 뿌리는 시간과 돈.

위탁판매는 수수료 떼면 남는 것도 별로 없다.

그나마 모은 돈은 싹싹 긁어서 매장과 작업실 운영비와 재료비, 카드 값으로.


돈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관계의 갈등도 힘들었다. 함께 동업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각기 달라서 마케팅과 영업도 쉽지 않았다.

운영자들의 마음이 한 데 모이지 않았다. 마음고생 몸고생에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게 끝났다.


결혼하기 전에 매장이며 작업실이며 싹 정리해서 손 털고는 그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남편과 집안 식구들도 집에 있는게 돈버는 거라고 제발 집에 있으라 했다.

나도 20대에 얼결에 시작한 사업이 녹록치 않았고, 결과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더 터라 그만 두는 것이 아쉽지도 않았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핑계가 고마웠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에 교육장, 작업실, 동업, 매장 운영까지 하다니 대단한거지,,,)

가끔 내가 만들었던 장신구들을 착용하며 추억하는 정도였다.




남편에게 서귀포 카페 언니에게 기념품 만들어 팔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더니

나의 20대를 함께 겪은 남편이 말린다.

그거 다시 시작하지 말란다.


그래도 내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을 실물로 보고 싶은 마음에 궁금해서 샘플을 제작해 본다.



이쁘고 마음에 든다.

다른 샘플들도 만들었지만 역시 동백꽃이 제일 마음에 든다. '그래도 시리즈로 서너가지 구색은 맞춰야지, 기왕 만드는 김에 동네 카페나 소품샵에 납품해 볼까? 브랜드 네임은 뭘로하지?'하며 예전 하던 방식이 종목을 바꾸어 리플레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걸 얼마에 팔 것이며,

이렇게 만들어서 인건비는 나올지,,,


그때처럼 애만 쓰고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건 아닐지

걱정을 넘어선 두려움이 있다.

오늘 큰아들 봉사활동 간다고 한라 도서관 두 번 왕복, 밀린 빨래하러 빨래방 다녀오고, 재료 사러 화방에 다녀오고 방에서 뭘 좀 만들었더니,,,


그 사이 집이 난장판이다.

애들은 뭘 만들어 먹고는 그릇을 싱크대며 식탁에 쌓아 놓고,,, 하여간 엉망이다.


아이들 게임하는 자유의 날엔 이정도 어지르는 것은 보통인데,,, 내가 신경을 다른데 쓰고 있으니 집안 일이 더 귀찮게 생각되고, 아이들을 지휘해서 집안 정리할 에너지가 별로 없다.


다른 샘플들 만들 때 머릿 속으로 생각한 대로 잘 만들어 지지 않고 재료의 한계에 짜증 난 것이 에너지를 떨어뜨린 것 같기도 하다.




잠깐 스톱!!

예전 패턴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기 전에

손과 머리와 마음을 멈춘다.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

선택이 필요한 일인가, 조화가 필요한 일인가,,,


호기심, 두려움, 재미, 보람, 돌봄, 안정감, 편안함, 여유, 조화,,,

나의 많은 느낌과 욕구들을 잘 살펴서

내 감정의 파도를 충분히 오르내린 후에 결정해야 겠다.


꽃 자석 몇개 만들고는 뭐가 이리 비장한지,,,


아마 16년 전의 씁쓸한 경험과 아쉬운 기억들이 되살아 나서 그런 듯 하다.

충분한 축하와 애도의 시간 없이 그냥 도망치듯

서둘러 덮어 버려서 상처가 잘 아물지 못 했나 보다.


이 참에 피하지 말고 좀 만나봐야 겠다.

뭘 어떻게 만나야 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쩝.


일단 보류하고 내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잘 관찰하는 것이 먼저.

예전의 묵은 먼지는 털어 내고, 상처는 보듬어 주자.


이제는 그때보다 성숙해진 어른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과 경험의 재구성이 필요한 때이다.




아슬아슬한 모험과 판타지가 가득한

제주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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