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혼내주기.
나는 아들이 셋이다.
생각이 빠르고, 행동은 생각보다 더 빠른 첫째.
과자 한 봉지 고르는 데도 기다리는 사람 숨 넘어갈 정도로 오래 걸리는 둘째.
형들과 4살, 6살 터울이라 얼울함을 고자질로 승화시키는 셋째.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무슨 일이 발단이 되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날도 셋째가 번개보다 더 빠른 첫째 때문에 약이 올라서 울고불고 넘어가는 상황에 첫째는 수업이 있어서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그날 나는 매번 반복되는 아이들의 다툼이 지겹고 짜증 나서 몇 마디 형식적인 대꾸만 하고는 하고 있던 설거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둘째가 나서서 셋째를 달랜다. (보통 셋째를 약 올리며 쾌감을 느낀다고 서슴없이 말해왔던 둘째였다.)
어쩐 일이래?
나는 가만가만 설거지를 하며 아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형이 그림 그려줄게. 이게 큰 형이라고 생각하고 때리고 밟아 봐. 아주 못생기게 그리자. 눈은 어떻게 그릴까? 코는? 이렇게 못 생기게 그리자!" 한다. 약이 바짝 오른 셋째는 이것도 저것도 다 싫다며 울고 불고 하는데, 그런 동생을 달래 가며 동생이 주문하는 대로 최대한 못 생기게 그린다. 그러고는 거기다 화풀이를 실컷 하란다.
잠시 후 둘이서 키득대며 형아 괴물에 화풀이를 한다.
나는 솔직히 좀 걱정스러웠다.
나도 수없이 많은 시간을 (아마 200시간은 족히 넘은 듯) 집단상담에 참여하며 참여자들이 바타카를 두드리며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에 눈물 흘리며 함께 응원하기도, 내 상처를 함께 치유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여긴 노련한 진행자가 없잖아!!)
이 퍼포먼스가 어떻게 마무리될는지, 내가 어떤 시점에 적절하게 개입해야 할지 좀 긴장이 되었다. 게다가 화가 난 마음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직접 공격 대상으로 겨냥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직접 공격은 아닌 것 같지만, 그땐 심히 걱정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괜찮았다.
괴물을 실컷 혼내주고, 잠시 후 큰 형이 들어왔다.
걱정은 엄마의 몫이었고, 아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고 떠들며 놀았다. 동생들은 형을 이렇게 못 생기게 그려놓고 혼내줬다고 자랑한다. 그 얘기를 듣는 큰 아이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내가 조심스럽게 물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단다. 너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화난 감정을 표현한 거라고 말해주니 한결 나아 보이는 큰아이의 표정. 금세 아이들은 화해를 했고 언제 그랬냐는 듯...
울고불고 쌩지랄 퍼포먼스 후에 머리는 쑤세미가 되어서도 똥꼬 발랄한 모습으로 어미를 쥐락펴락 하는 녀석들.
잠시 후 동생의 문제 해결에 혁혁한 공을 세운 둘째가 개선장군처럼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나 화날 때 화풀이 못 하게 해서 화가 많이 났었어요."
형이나 동생이 없어지면 좋겠다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아주 강렬한 표현을 하는 둘째에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화가 났구나! 네가 바라는 건 뭐야?" 하는 정도로 말해 왔었는데 (내가 걔네 엄마거든??) 아이는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었나 보다. 그래서 동생의 화를 빌어 제 화풀이도 한 것이겠지. 그러고 나니 속이 시원했나 보다.
나는 시간들이고 돈 들여하는 것을 셀프로 하는 신기방기한 녀석.... 나 보다 낫구먼... =_=;;;
요즘 창조성을 깨우는 아티스트 웨이 12주 간의 워크숍을 셀프로 진행 중인데 첫 주에 '괴물의 전당'이 나온다. 나를 화나게 한 사람의 이름을 괴물의 전당에 올리고, 그 사람이 했던 행동들이나 말을 적어놓고 실컷 화풀이하기.
아이들이 했던 바로 그 퍼포먼스!!
책에서 그 부분을 읽고 아이들의 화풀이가 생각나며
신기하기도, 재밌기도, 감탄스럽기도, 서글프기도 했다.
직접 때리는 것도 아니고 못 생기게 그려놓고 때리는 것도 걱정하고 있던 나... 어흑... 그런 것도 못 하게 막으니 더 화가 나더라는 아들의 충고나 듣고... 우쒸! (나는 아이들이 싸우면 뇌가 작동을 멈출 때가 종종 있다........)
생각해보니 나는 적어놓기만 하고 어떤 액션은 아직 안 했네! 설마 내가 남한테 화풀이하는 것을 그 정도로 억압하고 있었나? (싸움을 못 하는 것이 나의 수많은 이슈 중 하나다 ㅠ ㅠ... 그러니 아들들이 싸우면 뇌가 일시 작동을 멈추지... )
오늘은 괴물의 전당에 올라가 있는 그 사람 그려 놓고,
어디 가서도 위로받지 못한 나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 신명 나는 씻김굿 한 판 벌려야겠다!!
두려움 없이...
이런저런 계산하지 말고 그냥 아이들의 놀라운 생명력과 회복력을 믿고, 온전히 그 아이의 마음에만 공감해주는 연습 더 많이 해야겠다!
고맙다.
오늘도 너희들 덕분에 엄마가 또 배운다.
2017.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