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내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내면의 부름에 더욱 적극적으로 응하여 진정한 나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다음이었다. 이 광대한 내면의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신비롭고도 산란한 여정 속에서 고양이라는 존재만큼이나 다루기에 가장 까탈스러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난제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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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 in Wonderland』(1865)였다. 나는 이 고전 동화가 내가 지금까지 이끌려 왔고 앞으로 더욱 깊어질 내면 탐색으로 구성된 인생 구조의 모델이자 그와 함께 쓰게 될 이야기의 원형임을 직감했다. 이 동화에서 고양이는 두 마리가 등장하는데, 현실에서 앨리스가 키우는 집고양이 ‘다이너’와 앨리스가 꿈의 세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악명 높은 ‘체셔 고양이’다. 앨리스와 고양이. 토끼 굴을 지나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호기심 많은 소녀와 길을 알려주는 듯 방해하는 듯 알쏭하고 신묘한 존재의 만남. 둘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탐험하고 해석하고 개척해 나가며 밀고 당기는 관계의 역학 속에서 독특한 동맹을 이루는 짝이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한참 주목하고 몰입할 당시에도 나는 앨리스와 고양이를 내 인생 이야기의 상징으로 선명하게 의식하지 못했다. 그것과 정말로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자신을 길고양이로 장난스럽게 소개했던 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마련되었다. 그는 외롭고 아주 민감한 사람이었다. 관계에 대한 갈망이 깊으면서도 자신만의 경계가 확고하게 있는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오갈 데 없는 마음을 음악, 영화, 상상 속 이야기, 풍경 이미지나 색감, 글귀 등에 예술적으로 투영시키며 알게 모르게 자신만의 원칙과 세계를 만들어 왔다. ‘고양이’는 그런 그의 고독한 세계를 대변하는 마스코트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나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고양이를 매개로 그는 내 세계와 언어를 즉시 본능적으로 알아보았고 ‘앨리스와 고양이’를 시작으로 내 내면의 상징을 파고들었다. 이후에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그는 그 자체로 정말 한 마리의 고양이다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와 여느 연애에서처럼 빠르고 강렬하게, 하지만 누구와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독보적인 방식으로 사랑에 빠졌다. 아니, 엄밀히 말해 이 관계에서는 종결되지 않는 감정의 호우가 쉴 새 없이 휘몰아쳤으며, 사랑은 매번 지연되는 듯했고, 우리는 완성 직전 상태에서 허우적댔다. 관계가 가까워지고 감정이 깊어질수록 희한하게 숨겨져 있던 더 높은 벽이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물음표가 한가득이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에게 그런 존재이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물음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장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난 거리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타워 크레인의 지프 같은 길 위에서 그것을 계속 따라갔다. 그 선택은 엄청난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하지만 불행한 반전이 있었다. 어쩌면 이미 지속적으로 휘청거리던 관계 속에서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깊고 솔직한 감정을 나누는 과정에서, 보다 정확히는 진정한 사랑이 시작될 것만 같은 특별한 시기의 절정에서 그는 급작스레 나를 떠났다. 나에게 인생 최대의 묵직한 과제를 남기고.
처음부터 그 과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엄청난 배신감에 시달렸고 그것을 기어이 안으로 삼켰다. 다 타 버린 재 같은 분노 뒤에는 슬픔이 너울댔다. 그리고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 한 가지. 사랑을 서로에게 고백한 직후에 그 관계를 떠나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대개는 이 시점에 사랑이 시작된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과 혼란이 엉겨 붙은 상태에서 나는 그가 왜 떠났는지에 대한 단서들을 하나씩 천천히 찾아갔다. 여기저기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퍼즐을 하나씩 주워 맞추어 가듯이.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반쯤은 눈을 감은 채로. 네가 떠난 건 나한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그에 더해, 문제의 복잡성은 그가 완전히 나를 떠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물리적으로 언어적으로 떠났을지언정, 그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내 안에 그의 존재를 강화시켰다. 더불어 그와 나는 이후에도 미묘한 소통을 이어 갔다. 처음부터 민감한 반응과 격렬한 감정들 속에서 이 관계를 기묘하고도 견고하게 지탱했던 예술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나는 이런 비상한 교류로부터 그와의 이별과 여전히 모호하게 지속되고 있는 이 관계를 규명하는 데 많은 단서들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가 떠나기 전 함께 나누었던 대화, 맞추었던 시선, 기억 속 잔재하는 목소리 등 과거의 필름이 천천히 돌아갔고, 편견과 오해를 닦아 내며 새롭게 자각하게 된 사실들이 덧붙여졌다. 어쩌면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욱 생동감 있는 실체로, 말과 행동에 자신만의 이유가 있는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그는 되살아났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과제란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원가정 속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가슴속에 품고 살며, 그것을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깊이 건드리는 사람, 즉 비슷한 결핍을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 그가 떠나고 나는 내 결핍과 상처, 그것의 근원인 가족과의 갈등과 불통을 더욱 적나라하게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가 떠난 뒤, 나는 가족들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는 치유와 대화의 과정을 겪었다. 무엇보다 그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의문은 더이상 비껴갈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의 나는 누구이며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제대로 대면하지 않고서는 이 관계의 불가사의를 풀 방법이 없었으며, 이 문제를 되뇌일수록 나를 감싸고 있던 두터운 방어벽이 떨어져 나갔다. 내가 안다고 느꼈던 나의 모습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 적어도 그의 앞에서 나는 점차 무방비 상태가 되어 갔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의식과 무의식의 정신적 · 영적 통합을 이루어 가는 ‘개성화’의 길 위에서 우리는 ‘자기’,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등 여러 정신적 원형의 상징들과 조우하게 된다. 고양이는 나의 ‘아니무스’였다. ‘아니무스’란 여성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남성성의 원형을 지칭한다. 꿈이나 환상 속에서는 이성의 모습, 신비로운 안내자, 혹은 유혹자 · 파괴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니무스가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고집, 독선, 비현실적 신념, 공격성으로 굳어질 수 있다. 반면 아니무스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통합할 수 있다면 내적 힘, 이성적 사고, 정신적 통찰을 갖추게 되며 이러한 전환을 통해 자기와의 만남에 가까워질 수 있다.
한 여성이 자기의 아니무스 문제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며 많은 고통이 따른다 […] 그러나 만일 그녀가 그녀의 아니무스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또한 그 아니무스가 그녀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그녀가 스스로 이에 사로잡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그 현실들에 직접 대면한다면, 그녀의 아니무스는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 내적 동반자로 바뀔 수 있으며, 이것은 그녀에게 주도성, 용기, 객관성 그리고 영적인 지혜 등의 남성적인 성질을 부여한다.
- 칼 구스타브 융 엮음, 이부영 외 옮김, 『인간과 상징』,
「제3장 개성화 과정 :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아니무스 : 마음속의 남성’,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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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에 가족과 함께 생명나무를 만난 이후 셋째 날, 과거의 관계들이 유령처럼 되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참혹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일기 2025.4.11.-
어둑한 밤, 홀로 골목길 앞에 서 있다. 나는 어떤 현실 같은 시뮬레이션 안에 있고, 그 길을 통과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골목길 위에는 마치 낮은 천장처럼 그리드 형태의 설치물이 깔려 있다. 설치물에는 끔찍하게도, 수십 마리의 죽은 고양이들이 빨래처럼 널려 있다.
꿈속에서 고양이의 죽음, 내 아니무스의 종말을 목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