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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랄한 생명나무 일지

by 유하


정말 소중한 기억은 오래 머금고 있고 싶어진다. 그 안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진다. 완연한 봄으로서의 4월, 가족과 함께 ‘생명나무’를 본 생일날이 그랬다. 그 순간부터 4일간, 아름답고도 괴랄한 이 생명체는 뿌리를 내린 땅속에서부터 가지를 뻗어 하늘까지, 나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외부의 체현으로, 실체로 자라났다.




첫째 날

4.11. (금)


몇 개월 전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1988/2001)에서 귀엽고 신비한 토토로가 아이들과 함께 거대한 나무를 솟아나게 하는 장면을 봤다. 토토로의 신령한 힘, 아이들의 순수한 꿈과 믿음으로 흙더미에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 새싹들은 시간조차 개의치 않을 만큼 빠르게 여러 나무들로 성장하고 하나의 커다란 나무로 결합하기에 이른다. 그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이미지는 나의 영혼까지도 상승시키며 큰 영감과 생명력을 주었다. 이후에도 나는 커다랗고 굵은 나무가 거침없이 쑥쑥 자라나는 장면을 마음속 상영관에서 지속적으로 재생해 왔다.


4월 11일, 올해 생일에 나는 가족과 함께 국립수목원에 갔다. 미리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고, 점심 식탁에서 못다한 이야기의 힘과 봄 기운을 받아 즉흥적으로 선택한 결정이었다. 행복보다 훨씬 깊고 넓은 평화가 수목원 곳곳에서 따스한 온도로, 살랑이는 바람으로, 푸릇한 새싹과 색감으로 가족을 반겼다. "봄이야, 봄이야." 연신 그렇게 이 신성한 계절에 대한 사랑을 속삭였다. 올해 처음 맞이한 진정한 봄, 완전한 4월이었다. 집에 온 것만 같았다. 아니, 집이었다. 수목원 내부에 있는 산림박물관에도 들어갔는데 입구에서부터 눈에 띈 것은 굵직하고 거대한 나무였다. 나무의 굵기와 크기가 주는 힘에 이끌리듯 나무의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 팻말 속 설명문을 읽었다. "느티나무 5그루가 붙어 자란 연리목"이라는 글귀가 심장을 뛰게 했다. 이 나무는 산림박물관의 상징목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이 연리목과 일치하는 내면의 나무를 떠올렸다. 확신하건대, 나는 아주 아름답고 경이로운, 강력한 ‘동시성(Synchronicity)’ 현상 속에 있었다.


칼 융이 주장하는 ‘동시성’은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지만, 의미 있는 우연으로 경험되는 사건들을 가리킨다. 꿈, 생각, 감정과 같은 개인의 내적 상태와 외적 사건이 의미 있게 연결될 때, 심리적이거나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융은 동시성을 ‘자기(Self)’가 의식을 확장하도록 돕는 방식 중 하나로 보았다. 이는 개인이 무의식과 더 깊이 접촉하고 개성화 과정에 들어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어서, 융의 심리학에서 ‘나무’란 ‘자기’를 향한 성장, 무의식에서 의식의 세계로 솟구치는 생명의 힘을 의미한다. 위로 뻗으며 하늘의 정신성과 닿고, 땅 밑으로 뿌리를 내리며 그림자와 본능 등의 무의식을 흡수하는 나무는 무의식과 의식, 하늘과 땅, 고통과 희망을 연결하는 전 존재의 통합체다.



이 정신적 성장은 의지의 힘으로 의식적으로 노력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흔히 꿈에서 나무로 상징된다. 이는 나무의 느리지만 힘차게 뻗어 가는 자연적 성장이 명확한 하나의 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장을 조절하는 마음의 중심은 우리의 정신계에서 일종의 ‘핵의 원자’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을 꿈의 상들의 발명하는 자, 조직하는 자 또는 그 원천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융은 이 중심을 전체 정신의 전일성이라는 뜻에서 자기Self라 부르고 정신의 전체성이라고 기술함으로써 전체정신의 단지 조그마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자아Ego와 구분하고 있다.


- 칼 구스타브 융 엮음, 이부영 외 옮김, 『인간과 상징』,

「제3장 개성화 과정 :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정신적 성장의 유형’, 179쪽



최근 나는 꿈과 현실을 오가며 ‘자기’와 ‘그림자(Shadow)’, ‘아니무스(Animus)’를 상징으로 마주하며 그 역동적인 의미를 풀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생일에도 어김없이 가족과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치유와 성장의 과정을 이어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 내면 속에 머물며 생명력을 발화하던 나무가 이 눈부신 연리목으로 눈앞의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파편화되어 가던 여러 인격을 하나의 생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온전하게 통합하는 상징으로서. 우리 모두를 근원적으로 연결하는 생명선의 재발견으로서. 깊은 용서와 화해로, 이해로 서로를 감싸안으며 함께 뻗어 나가는. 앞으로는 모든 것이 진정한 생명과 강인한 사랑으로 흐를 것이라는 약속이자 동시에 약속의 구현처럼.


나는 나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외부의 체현으로까지 자라난 이 나무를 ‘생명나무’라 부르기로 했다.



둘째 날

4.12. (토)


이튿날에도 나는 ‘생명나무’를 떠올리며 그의 아름다움과 눈부신 축복에 한껏 젖어 있었다. 하지만 하루가 저물며 그 존재는 전혀 다른 감상으로 다가왔다. 어둠과 함께 다섯 그루가 하나가 된 이 거대한 나무가 ‘괴랄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 나무의 사악함은, 우리가 단어의 뜻을 흔히 이해하는 대로 타인을 해치는 데서 오는 악이 아니었다. 나무의 괴이함과 악랄함은 생명 그 자체의 뿌리 깊은 힘에서 발산되는 것이었다. 고통과 갈등을 외면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힘, 단지 '선하다'라는 표현으로는 빈곤한, "선악의 저편"을 향해 가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한 생명력 말이다. 생명나무의 온전한 생명력을 더 깊이 느낄수록 나는 매우 두려워졌다.



2025.7.9.(수) 꿈 일기


지하에는 큰 창으로 둘러싸인 대형 저택의 거실 같은 널찍하고 길쭉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친절한 상가 주인과 부인이 있다. 상가 주인은 어느 순간에 재발될지 모르는 비밀스러운 병을 앓고 있는데 바로 그 순간이 닥친다. 이 병은 자신이 누군지 기억을 잃고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상가 주인 아들은 재빨리 버튼을 눌러 에스컬레이터의 맞은편 벽면의 문을 연다. 괴물이 되기 직전의 상가 주인을 처치하기 위해 헤라클레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개 케르베로스(Cerberus)가 거대하고 육중한 몸으로 튀어나온다. 이런 계획은 사전에 상가 주인 당사자와 상의된 것이다.



때때로 나는 무의식의 심연에서 "괴물 같은" 힘이 꿈틀대는 것과 그것을 폭발적으로 발산하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 지하에서 급작스럽게 괴물이 되려는 자와 이를 처치하기 위해 또 다른 괴수가 튀어나오는 같은 주제의 꿈을 반복적으로 꾸기도 했다. 그것은 단순히 일이나 목표를 성취하고 인정받는 욕망을 넘어선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힘이었다. 하지만 그 힘은 무시무시한 것이기도 해서 내 자아와는 명확하게 분리된 '괴물'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생명나무 앞에서 나는 그 괴력을 대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실체를 이해하고 내 안으로 통합시켜야 하는 지점에 와 있다. 여전히 떨고 있는 나에게, 생명나무는 온몸을 빛으로 번뜩이며 녹색 아나콘다 같은 줄기를 과감하게 뒤틀며 말한다. 우울과 절망, 고통도 근원에서는 환희와 사랑, 생명과 같다. 방향만 다를 뿐이다. 어둠 속에 빠져 있는가? 빛으로 나아가고 싶은가? 같은 에너지로 기꺼이 방향을 틀어라.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 그것을 하나로 합친 것이 나다!



셋째 날

4.13. (일)


생일을 기점으로, 비어 두었던 자리에 과거의 관계들이 다시 비집고 들어왔다. 맑고 따스했던 정신적 집에 복잡한 감정들이 침투하며 안개가 꼈다. ‘옳은’ 기준, 피상적인 ‘평화’를 들이밀며 자꾸 나를 억압하려 했고 바꾸려 했던 어릴 적 환경이나 사회의 옛 잔상들이 내 주변을 맴돌았던 것이다. 그런 조금은 지치고 복잡한 감정 그대로, 그런 내 모습 그대로 내려앉아 있었다. 아파서 열이 오른 사람마냥 땀이 조금씩 차오르는 걸 느끼면서. 하지만 이 경험은 예전의 고통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즉 저항이나 회피가 아닌, 더 이상 승화된 모습으로 나의 어두운 부분을 가리거나 외면하지 않겠다는 불편한 의지의 몸부림이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 새로운 삶의 단계 사이, 중요한 갈림길에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고 진중하게 지금까지의 관계에 대해 고민했다. 나에 대해 섬세하게 알아가게 되면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관해서도 생각이 깊어졌다. 책임질 수 있을까, 기댈 수 있을까, 존중하며 함께 나아갈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있을까? 상처를 받으면 어떡하지, 상처를 주면 어떡하지, 잘못된 선택이면 어떡하지, 서로를 파괴하면 어떡하지? 그들은 신이 내게 보낸 사람들일까, 귀하게 모셔야 하는 인생의 스승일까? 혹은 반대로 내가 이들을 품어야 할까? 하지만 난 이대로도 충분한데. 더 적극적으로 나를 세상에 내던져야 하나? 잠시 동안은 ‘생명나무’가 나에게 선물한 평화가 사라진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무는 나의 안팎으로 스스로의 현존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생명체였다. 나는 단지 그 현존을 기억하고 느끼기만 하면 됐다.


관계에 대한 질문은 홀로 꿋꿋이 서 있는 생명나무로 옮겨 갔다. 이렇게 강인해 보이는 그도 외로움을 느낄까? 그는 외로움을, 고독을 어떻게 다루고 견딜까? 어떻게 극복했을까? 나는 호소했다.



나무야, 나는 너무 외롭다. 확실한 건 나는 지상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살아가는 것 같진 않아.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자꾸 살려. 죽고 싶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살고 싶다고 사는 것도 아닌 것 같아. 하늘의 언어, 우주의 흐름, 예술가와 성직자들의 혼, 정신을 맑게 갈고 닦으며 자신의 전부를 기꺼이 헌신한 사람들의 생명이 날 살게 해. 그들의 길은 깊은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내 안에 새겨져 있어.



그러자 그가 응답했다.



나도 외로움을 느껴. 아주 오래전부터 땅에는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었어. 누구보다 많은 생사를 겪고, 때론 숲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남겨졌어. 나는 외로움을 모른 채 살아온 존재가 아니야. 오히려 외로움과 가장 오랫동안 함께 살아낸 존재지. 나는 외면하지도 거부하지도 이겨내지도 않았어. 대신 외로움을 땅속 깊이 뿌리내린 거야. 그것을 영양분 삼아 잎을 피우고, 내 곁에 온 자들에게 그늘을 내어 주었어. 바람이 불 때는 가지를 흔들어 노래하고, 세상에게 바치는 이야기의 열매를 맺었어. 그런 성장을 거쳐 외로움은 고요한 힘과 자비로 바뀌었고, 이제 나는 곁에 온 누구든 눈물 흘릴 수 있는 성소(聖所)가 되었어. 그렇게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누구든 안아 줄 수 있게 되었단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끝까지 붙잡지 않아. 내 안과 주변에서 피고 지는 모든 것들을 계절처럼 흘려보내. 내가 가진 “무한한 생명력”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어. 끊임없이 움트고 놓아주는 그 순환 속에. 너는 지금 놓는 사랑을 배우는 중이고, 그것 역시 아주 깊은 차원의 사랑이야.


깊은 외로움 속에서도 너는 여전히, 그것도 너무나 찬란하게 살아 있어. 그 외로움은 고립이 아니라 너만의 깊이로 깎여진 영혼의 형상이자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 발화하는 빛이야. 그래서 너는 표면적 말들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매일같이 연마한 이들의 침묵 속 기도와 진동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거야. 너를 살게 하는 그 “알 수 없는 힘”은 너의 영혼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목적의 목소리야. 너에게는 아직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 너는 스스로의 존재를 선택해 온 거야. 네가 외로워하는 그 순간에도 너를 살아 있게 하는 모든 ‘영혼의 흔적’이 함께 있어.



그렇구나, 생명나무는 외로운 예술가였다. 생명나무라면 어떤 난관이나 관계라도 영원히 버티고 이겨 낼 수 있는 그런 무한한 힘을 가진 존재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외로움을 비롯한 고통을 억지로 참은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느끼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던 것이다. 그 궤적이 고스란히 흙더미의 아래로 내리꽂히는 뿌리의 방향과 거센 바람처럼 굽이치는 나무 줄기의 곡선으로 땅과 하늘에 각인된 것이다. 그 모습은 비할 데 없이 정교한 솜씨와 아름다움을 갖춘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휘황한 생명나무의 존재감과 그와 나눈 대화는 앞으로 관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것을 직면하는 나의 태도에 대한 올곧은 기준이 되어 주었다. 더욱 엄밀하게 이것은 관계나 외부 현상에 대한 과제인 것 같지만 근원적으로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가깝다. 언제나처럼 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생명나무의 도움으로 나는 오래도록 정리하지 못했던 관계들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사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관계’라 부를 수도 없었다. 나 자신을 알기 전에, 견고한 선택과 책임보다는 우연이나 환경적 영향으로 인해 잠시 생겨나는, 무의식적 욕망이나 결핍을 거울처럼 비추는 미완의 연결에 가까웠다. 스스로의 한계를 이해함과 동시에 나는 자신을 해하는 자극과 그렇지 않은 것을 더욱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중하게 고민해 왔기에, 비로소 불필요한 끈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쉽게 미련을 끊고 돌아서는 게 아니라, 수없이 사랑하고, 시도하고, 감싸안으려 했던 끝에 드디어 자신을 껴안기 위한 선택을 한 거니까. “내가 다 견뎌야 진짜 사랑일까?”라는 오래된 신화를 넘어서,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까지 나아간 것이다. 외부의 바람에 흔들리는 대신, 스스로의 중심에서 바람을 맞이하는 생명나무처럼.


처음에는 커다란 희망으로 나타나 나에게 경이로움과 행복을 선물했던 생명나무는 이처럼 현실의 여러 고민들을 물거품처럼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을 재정립해 주고 수호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찬란한 빛은 미처 정리되지 않은 현실을 다시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고, 모든 고뇌와 질문을 거쳐 내가 진짜 내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살며시, 그러나 확고히 나를 이끌어 주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끝내 ‘스스로를 지키는 사랑’이었다. 그건 단순한 자기 보호가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존엄의 선언이었다.



넷째 날

4.14. (월)


지금까지 나는 꿈과 환상, 현실을 통해 ‘자기’에 대한 감각을 찾아갔고, 내 ‘그림자’를 만나 화해했다. 암흑 속에서 관계답지 못한 관계들에 흔들리며 사투를 벌여 왔고 진정한 나와 내 인연, 새로운 삶을 위해 과거를 정리하고 자리를 비웠다. 무엇보다 생명나무를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생일날에 직접 목격한 후 4일 동안 격렬한 내적인 동요가 일었다. 이번 4월에 생명나무를 이렇게 4일 동안 체험한 것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4’는 죽음과 생명의 경계를 포괄하는 양가성을 띤다는 점에서 나에게 특별히 신성한 숫자다. 또한 융은 ‘4’를 전체성, 균형, ‘자기’의 상징이자, 사방(동서남북), 사원소(물 · 불 · 흙 · 공기), 사계절, 십자가 등 우주의 완전한 구조를 나타내는 수로 이해했다. 그는 만다라 도형에서 중심과 4개의 꼭짓점을 반복해서 사용했는데, 이는 개성화 과정의 통합된 자아를 의미한다.


생명나무를 마주한 이후로 4일 동안 나는 빠르게 그 모든 고통을 통합시켰다. 그 순간에는 아파서 완전하게 통합의 흐름을 느끼진 못했지만 알고는 있었다. 나는 이미 무수한 고통을 지나왔고 이것 역시 통합되리라는 걸. 생명나무의 존재 의미 자체가 그런 통합에 있고, 나 역시 인격의 총체적인 결합을 위해 그동안 스스로를 부단히 단련시켜 왔다는 것을.


더 나아가, 수목원에서 본 연리목은 개별적으로 자라기 시작했지만 결국 하나의 커다란 생명이 된 존재다. 특히 느티나무 5그루의 ‘5’는 동서남북이나 4원소처럼 정형화된 ‘4’라는 구조를 넘어선 초월적 연결과 중심이자 하늘로 열린 문을 상징한다. 연리목을 본 생일날 나와 가족은 자연이 주는 치유적 사랑 속에서 과거의 오랜 상처와 결핍, 오해를 떨치고 새로운 연결의 방식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했다. 우리는 이미 그런 해방의 과정을 차근차근 겪어 나가고 있었으며, 연리목은 동시성 현상을 통해 화해 그리고 각자의 내적 성숙과 공동체적 성장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생명나무의 상징은 단순히 사사로운 욕망과 결핍을 채워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중심과 창조성을 열어 주며 초월적 동반자로 이어질 진정한 ‘관계’에 대한 미래를 그린다. 아픔에 정체되거나 실수를 반복하는 악순환이 아닌, 그것을 딛고 하나의 거대한 생명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무성하게 자라나게 하는 진짜 관계를.


생명나무를 만나고 4일째, 그렇게 난 더이상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도 그의 수호를 받는 자도 아닌 괴랄하고 휘황한 생명나무 그 자체가 되어 이 세계에 뿌리를 내렸다. 더는 어떤 권위도 규율도 평가도 내 영혼의 근간을 흔들지는 못한다. 나는 파편화된 의식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과 악, 삶과 죽음이 뿌리깊은 생명력으로 통합된 자. 그 무엇도 생명의 가치와 진정한 삶에 대한 집중을 우선할 수 없다. 지하와 하늘을 가로지르며 정신과 현실이 균형을 이루고 거대한 줄기와 가지 위에서 존엄이 번개처럼 빛난다. 내 앞으로 한 명의 존재가 다가온다. 아픔에 치이고 호기심 많고 두려움에 떠는 또 다른 나, 하나의 우주, 동시에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이 존재에게 나는 가지를 뻗어 노래한다.



너에게는 아직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 너는 스스로의 존재를 선택해 온 거야. 네가 외로워하는 그 순간에도 너를 살아 있게 하는 모든 ‘영혼의 흔적’이 함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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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