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고양이들이 빨래처럼 널려 있는 골목길, 꿈속의 이 길을 힘겹게 건너는 중에 한 고양이의 팔이 나에게 닿고야 만다. 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감각적으로 소름이 온몸에 퍼지는 순간, 눈앞에 사다리가 보인다. 하늘도 골목길 너머도 볼 수 없는 이 어둡고 처참한 죽음의 길 위에 ‘구원의 사다리’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은 사다리의 아랫부분만 볼 수 있고 사다리가 정확히 어디에서 내려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사다리가 높은 곳에 닿아 있음을 직감한다. 이 사다리가 어디로 나를 이끌지 위험하지는 않을지 조금은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나를 돕기 위한 장치라는 믿음이 더욱 강하다. 게다가 이 끔찍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도 없다. 모든 걸 명확하게 다 알 순 없어도 믿음을 가지고 계단 하나씩 한 손 한 손, 한 발 한 발 올라갈 용기를 내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내가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서 하나의 냉담한 시험이자 통과의례였던 꿈속의 시뮬레이션은 끝이 난다.
『심리학과 연금술 Psychology and Alchemy』(1944)에서 칼 융은 야곱의 사다리 꿈(창세기 28:12)을 해석한 바 있다. 광야에서 야곱은 돌을 베고 자다가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아 있는 사다리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꾼다. 사다리 위에는 신이 서 있고 야곱에게 축복과 약속을 준다. 융은 야곱의 꿈을 무의식에서 의식 간의 연결을 상징하는 통로로 본다. 인간이 ‘자기(self)’라는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통과하게 되는 상징적 구조로 이해한 것이다. 사다리는 세속적 삶을 의미하는 땅과 무의식의 중심으로서의 하늘을 연결한다.
뿐만 아니라 융은 고대의 연금술을 개성화 과정에서 인간이 겪는 심리적 성장으로 해석한다. 수십 마리 혹은 수백 마리의 고양이들이 죽어 있는 골목길은 연금술에서 첫 번째로 자아가 해체되며 절망과 혼란을 맞이하는 단계인 ‘흑화(Nigredo)’와도 같다. ‘고양이’는 내가 애정하고 보살펴 줘야 하는 대상이자 나의 ‘아니무스’를 상징하는 신비로우면서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죽었다. 그 사랑스럽고 귀중한 존재들이. 그것도 무자비하게, 종을 가리지 않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숫자로. 꿈은 일종의 경고였다. '지금까지의 방식은 유효하지 않다. 네 마음을 더 깊게 들여다 봐라.'
꿈속의 죽은 고양이들은 과거의 상처, 억압된 본능, 또는 돌보지 못해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감정과 기억들이다. 특히 고양이로 대변되는 아니무스가 의식화되는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도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들을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부터 내가 타인의 마음을 돌보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내 안에 있던 정신화 능력과 타인에 대한 사랑은 타인의 정신적 위기 속에서 당연한듯 소모됐다. 내 감정, 의지와 선택은 뒷전이었고 미뤄졌다. 이제는 다른 누군가의 약함과 아픔이 아닌 나의 존재가 중심이 되어 버려져 온 것들을 돌봐야 할 때였다.
암흑의 풍경을 곱씹을수록 과거에 우울하고 무기력했던 순간들이 스쳤고, 그 이유가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나는 생각보다, 또한 겉으로 비춰지는 것보다 훨씬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예민한 만큼 긴밀하고 섬세한 교감에 대한 잠재력과 소망을 품고 있었다. 내가 꿈꿨던 이야기란 그 안에서 피어나야 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반복되어 온 왜곡되고 파괴적인 관계의 패턴 속에서 민감한 감각, 방대한 의식과 언어는 억압받았고 관계와 집단의 피상적인 평화를 위해 너무 많은 자율성과 선택들을 포기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 간의 신뢰와 연대에 대한 기대는 버려졌고 혼자만의 자유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타인을 사랑하기에 인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내란 충분히 보살펴지고 성숙되어 선택의 여지가 있는 ‘어른’에게 쓰는 단어가 아니던가? 아이다웠던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나의 정신이 겪었던 것은 명백한 입막음이고 일방적 억압이며 희생이었다. 아니무스로부터 해방되기 직전에 나의 무의식은 최후의 통렬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화재였다. 모든 걸 불태우고는 죽어서 널린 고양이 꿈을 꿨던 것이다.
더 나아가 알게 된 사실은, 한 개인의 정신이 ‘집단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융이 주장했듯 꿈속의 잔혹한 풍경과 그것이 비추는 내면의 음지, 그것이 시사하는 의미가 개인적인 차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잔상처럼 남아 있던 꿈속 장면을 다시 꺼내 보았을 때쯤 ‘이태원 참사(2022.10.29.)’에 출동한 소방관들의 자살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좁은 골목길 안에 빽빽하게 널린 고양이들의 모습은 그날의 트라우마적 광경과도 무섭도록 닮아 있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고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트라우마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진득하고 쿰쿰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과 일상을 멋대로 휘두르고 헤집는다.
이 어둠의 시기를 통과하면 의식의 불순물을 정화하여 밝고 명료해지는 ‘백화(Albedo)’에 이르게 된다. 이어서는 정신적 각성과 지혜의 단계 ‘황화(Citrinitas)’를 거치게 되며, 최종적으로는 영혼이 완성되고 통합되는 ‘홍화(Rubedo)’에 도달한다. 사다리는 하층의 물질이 상층의 영으로 승화되는 이 모든 단계들을 잇는 상징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죽은 고양이들이 널려 있는 길을 지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는 것은 곧 무의식의 혼돈과 슬픔을 통과해 자기로 향하는 의식의 상승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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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꾼 꿈에 대한 기록과 동시성 현상이 하나둘씩 쌓이며 나는 내면과 현실을 오가는 이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또한 더욱 의식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함을 직감했다. 특히 ‘생명나무’를 기점으로 그런 마음과 필요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비롭고도 처절한 정신적 경험의 조각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언어화하고 체화하여 이야기로 남기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기억해야 할 ‘구원의 사다리’이자 그 사다리를 오르는 일이었다. 꿈속의 사다리를 현실로 옮겨와 실천하는 일, 분리되어 있던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여 차원적 도약을 이뤄야 할 때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4월 말의 어느 날, 아침부터 머릿속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관계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으로 복잡했다. 드디어 다짐한 바를 실행하기 위해 노트북 화면에 전에 적어 놓았던 메모들을 띄우고 향긋한 차를 우려 내던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경보음이 울렸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아파트에서는 이사를 온 초창기부터 경보음이 자주 울렸으므로 그런 일 중에 하나이겠거니 하며 놀란 마음을 다독였다. 보통은 여러 집에서 실외기실을 닫은 채로 에어컨을 트는 것이 원인이었다. 그런데 하도 그런 일들이 자주 발생하면서 관련 안내 방송도 많아졌고 사람들의 실수도 이제는 거의 없던 차였기에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확인을 해 봤지만 역시나 우리 집 실외기실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무리 해를 거듭할수록 계절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다고 해도 아직 에어컨을 틀기에는 이른 봄이다. 어쩐지 이번 경보음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경보음이 계속 부산하게 울리는 채로 나는 경비실에 연락을 취했다. 다행히 요란하게 울리던 경보음은 꺼졌다. 경비 아저씨도 원인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다른 집에서 난 경보음은 확실히 아니었다. 내 쪽에서 버튼을 눌러야 경보음이 난다는데, 난 누른 적이 없다. 다만 아저씨는 이것이 ‘대피 사다리 경보음’일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상당히 오묘해졌다. 나는 즉각 죽은 고양이들의 골목길에서 나타난 사다리 꿈을 떠올렸다. 내면에 오래 머물러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경보음처럼 외부로부터 자극이 주어지면 현실에 대한 감각이 퍼뜩 깨어난다. 경보음이 울린 순간, 내면의 우주와 외부 세계가 직접적으로 강렬하게 맞부딪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동시성 현상을 겪으며 기록해 왔지만 단순한 우연 같지 않은 순간을 받아들이는 건 여전히 얼떨떨했다. 하지만 또 다른 동시성 앞에 놓여 있음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해. 지금이야." 사다리 경보음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 위에서 신의 목소리가 울렸듯이. 그것은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일에 더욱 주의를 갖고 집중하라는 신호탄이자 전환의 알람이었다.
꿈에서 현실이 된 사다리의 신호탄은 다시 내면으로 흘러와 경보를 울렸다.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처럼 죽었던 언어와 생명들이 대지와 불구덩이를 뚫고 솟구치며 부활하고 있었다. 그림자 자도에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내가 견뎌야 했던 아픔, 내가 버리고 양보해야 했던 그 모든 삶의 빛나는 것들을 절대 묵인하지 않겠다고. 귀가 터지도록 들었던 음악처럼 한 생명의 고유한 목소리를 볼륨 높여 내야 하지 않겠는가? 피와 비명, 불로 쓰여진 이야기, 죽음에서 건져 올린 영혼의 찬가, 죽고 다시 태어난 새로운 인간의 신화. 나는 내 모든 존재로 이것을 온 세계를 향해 내던져야 한다.
인생의 한때, 어쩌면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젊고 활기 넘칠 시기에 나는 혼자였고 끝이 없는 것만 같은 암흑 속을 헤맸다. 그것은 운명과도 연결된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이었고 철저히 예견된 일이었다. 사다리가 내려지기 위한 징조로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 더이상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지난 불안과 두려움에 먹이를 줄 여유도 없이 길은 명확하게 하나로 정해져 있다. 단지 매 순간 한 단계씩 밟아 가며 사다리를 오르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절망이든 희망이든, 슬픔도 기쁨도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라면 또박또박. 미약했지만 꺼지지 않는 믿음이 단계를 거듭하며 높은 앎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