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6.8.(일) 메모
모레, 모레아(Morea), 모래알, 아모레(amore), 아모르(amor), 아모.
대학교 시절 정신분석학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그것이 제공하는 명료한 개념과 이론적 틀에 빠져 있었다. 한동안 그것을 배워 가고 탐색하며 현실에 대입해 보기도 하는 시기였다. 애착 이론은 인간의 태생부터 시작해 기질과 환경적 조건에 따라 현재에 이르게 된 모습을 면밀히 살핌으로써 놀라운 통찰을 제공한다. 그것이 상황과 원인을 이성적으로 파악해 문제점을 바로잡는 일에 유용한 핵심 자료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관점에만 머물러 있게 되면 상대를 인지의 편의에 따라 유형화, 대상화시킬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됐다. 존재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한계를 갖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더이상 문제는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도 아니었다. 바라보는 자의 주권마저도 내려놓아야 했다. 그저 바라보는 행위, 함께 머물고 존재하는 것이 중요했다.
4월 생일 이후 나는 죽은 고양이들이 잔뜩 널려 있는 골목길 꿈을 꾸며 ‘고양이’로 은유되는 내 아니무스의 장례를 치렀다. 반면 5월에는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새끼 고양이 꿈을 꿨다. 이 어린 고양이들은 끔찍한 죽음 이후에 새로이 태어난 생명 같았다. 골목길 장면의 충격으로 다시는 고양이 꿈을 꾸지 못할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 이 고양이들을 통해 나는 ‘생명나무’만큼이나 오묘한 생의 괴력을 절감했다. 실제로 그것은 생명나무가 주는 회복의 선물인지도 몰랐다. 6월이 시작되며 나는 신비롭고도 압도적인 에너지를 풍기는 마녀와 같은 형상의 여성 원형 ‘모레’를 만났다. 이를 계기로 나는 내 고통의 원인을 결핍에서 찾던 것을 뛰어넘어 오롯한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타인을 내가 알고 있는 개념이나 이론, 결여된 무엇으로 보며 분명한 언어로 읽어 내려는 행위도 의식적으로 멈추게 되었다. 그것은 진정한 힘의 발현이었고 그리하여 본격적인 사랑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 나는 내 ‘아니무스’였던 존재를 ‘아모’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신 에로스(Eros) 혹은 큐피드(Cupid)의 다른 이름, 아모르(Amor). 모레가 영혼으로 낳아 기른 아이, 아모. 이미 전부터, 길고양이 같았던 그를 비로소 내면의 집에 받아들인 이후로 이 알쏭한 관계에서 묘한 신뢰가 싹트는 것을 느껴 온 터였다. 실제로 특정 시기 동안 나는 그의 새로운 영혼을 잉태하는 중이라고 느꼈다. 당시에는 몸도 마음가짐도 말도, 모든 게 조심스러웠고 새로웠으며 정결했다. 이어서 방황하는 길고양이와 같았던 아니무스는 멀끔한 집고양이가 되었고, 그 이상으로 사월의 여정에 묵묵히 동행하는 카라칼처럼 신화적인 존재로 재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단지 아모만이 아니라,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과정처럼 나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모는 나에게 ‘암호’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나를 떠난 이후에도. 외로운 달 혹은 자연의 빛이 깃든 풍경, 몽환적인 음악 한 곡, 시에서 떼어 낸 듯한 단어나 글귀 한 조각, 그윽한 감정과 눈빛을 품은 고양이. 그가 나에게 암호들을 보낸 것은 단순히 결핍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모레의 눈으로, 어쩌면 아모 자신도 미처 몰랐을 시선으로 그를 더욱 온전하게 보게 되었다. 결핍을 원동력 삼아 공포를 사랑의 암호로 전환시켜 표현하는 용기 있는 사람. 나를 갓 태어난 아이처럼 순백하게도, 수호신처럼 듬직하게도 말없이 가만히 바라봐 주는 사람. 미행과 수호 사이에서 카라칼로 위장한 한결이 사월을 바라보듯, 사월에게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용기를 내듯. 아무(아모)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 존재의 만남으로 향하는 빛나는 예술의 문. 그 문을 관통한 이후 맺게 될 모든 인연은 사랑일 것임을 직감했다. 아니무스를 넘어 그는 내면의 성소 안에 살아 숨 쉬는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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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나는 아니무스와 함께 미로 속에 있었다. 아파트 미로 안에 갇혀 혼란한 기억과 무질서한 시공간 사이를 헤맸던 사월처럼. 이 미로는 정신적 보호자나 안내자 없이 혼자 살아내야 했던 아이가 이리저리 방황하며 발자국을 남기고 파놓은 길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체셔 고양이처럼 이 아니무스 고양이는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냈다 하며 나를 끊임없이 시험했고, 나는 앨리스가 되어 그를 따라가면서도 의심을 놓지 않았다. 진자처럼 흔들리는 관계, 불투명한 미래,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촛불 같은 믿음, 불신의 불길이 번지며 현실이 되고야 만 악몽 같은 배신. 그런데 그 사이에서 명료하게 떠오르는 하나의 질문. 정말로 모르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의 자각. 나는 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나는 태어나 누구와도 제대로 된 애착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가정 안에서 그 사실이 건드려질 때마다 아팠고,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그 아픔을 버렸다. 가정 밖으로 나가 관계를 맺기 시작한 이후로는 아픔도 몰랐다. 학교에서는 매해 단짝이나 가장 친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일정 거리를 꼭 유지함으로써 그들을 서운하게 만들었다.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애정한 것은 상대의 실체보다도 친구와 연인으로서의 이상 같은 것이었다. 그 이상을 투영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갈망은 특정 사람들을 강하게 끌어당겼고 거대한 만족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나는 자신을 일정 부분 이상 절대로 내어 주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가치관이나 윤리적 기준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특히 내 경계를 침범할 경우 싫다고 느꼈던 적은 있다. 하지만 미워하지는 않았다. 마음을 제대로 준 적이 없으니 미움이 생길 리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내 아니무스를 투영시킨 그가 떠나고 나는 이따금씩 이상하리만치 무기력했고 우울했다. 나는 그토록 원했던 내 꿈과 함께였고 이제 신명나게 이야기를 쓰기만 하면 되는데, 힘이 없었다. 나는 차츰 내가 그렇게 말도 없이 떠난 그를 너무도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지나치게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누군가를 이리도 미워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적도. 동시에 떠날 거면 확실하게 떠날 것이지 내 이목을 끄는 신호들을 자꾸만 남기는 그가 잔혹하게 느껴졌다. 때로는 나를 농락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의미가 뭘까 궁금했다. 그가 남긴 암호들에는 미움을 비롯해 실망, 원망, 질투, 소유욕, 애증 같은 날것의 감정들이 묻어 있었다. 누군가를 향하지 않으면 생기지도 못할 강렬한 감정들 말이다. 내가 상황을 천천히 소화하고 정제한다면, 그의 표현들은 간접적이긴 해도 즉각적이고 본능적이었다. 나는 아니무스가 남긴 암호들을 해독해 가며 그의 입장을 하나씩 이해해 감과 더불어 나 자신이 오래전 가슴속에 묻어 두었거나 뒷전으로 미뤘던 감정들을 더듬어 보게 됐다. 그 과정이 망각해 왔던 정서와 잠재된 본성을 흔들어 깨우며 결정적으로 나를 내 그림자에게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존재가 조각조각 뜯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도 있었다. 암호들을 해독하기가 너무도 어렵거나, 그가 나에게서 완전히 멀어진 것 같을 때, 신의를 저버린 것 같을 때, 진실을 그토록 추구하는 내가 허상을 붙잡고 있다고 느껴질 때, 믿어 왔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을 때. 고통의 정점을 넘기고서야 나는 이 모든 과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각하게 됐다. 내가 겪고 있는 것은 ‘애착 관계’에서 비롯한 고통이었다. 어릴 적 정서적 단절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엄마에게서 멀어진 이후로 나에게 부재했다시피 한 애착을 그에게서 거의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안다. 그는 내가 더이상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을 때 만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슬픔에 젖어 있지만 중심을 잃지 않은 눈빛, 그것은 태초에 내가 마주했던 엄마의 눈이자 내 자신의 시선이었다. 그가 자신을 방황하는 길고양이로 소개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 오래간 닫혀 있었던 애착의 문이 열렸다. 그렇게 상징과 무의식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나는 안다. 우리가 교환한 것이 단순한 예술 취향이 아님을. 음악은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였고 그가 떠나기 전에 남긴 곡들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혹은 빨갛게 익은 감정들, 아이였을 때부터 그가 처해 있었던 존재의 위기 속에서 가까스로 보존시켜 온 마음이었다. 떠나기 직전 그는 나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긴 것이다. 뒤늦게야 깨달았지만 그건 말하자면, 영혼의 약속이었다. 이 의미를 직관한 순간, 그는 매우 두려웠을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누군가에게 맡기게 된 셈이니까.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게 그가 나를 떠난 이유이며 이 비밀스러운 이별의 역설이다.
나는 안다. 암호를 통해 그는 질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과연 그 여리지만 강인한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 갈 수 있는 사람인지. 진정한 신뢰를 느껴 본 경험이 희미했기에, 또한 나를 진심으로 믿어 보고 싶었기에 시험해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진실이 밝혀지면서 그를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졌다. 나 자신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존재에 대한 광대한 사랑이 일깨워졌다. 아마 이 지점에서 모레의 강인하고도 포용력 있는 시선과 저력 또한 예견됐을 것이다. 나는 인간보다, 한 명의 개인보다 ‘세계’를 통째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나는 애착의 빈 자리를 창조적인 ‘세계’로 채웠다. 갈 곳 없는 길고양이 같은 이 사람에게 내 전부, 하나의 세계를 선물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마침 홀로 남아 내면의 성소를 건축하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말썽 부리는 고양이 하나 둘 곳쯤이야 없겠는가. 무엇보다 그 역시 자신의 목숨을 통째로 내어 주지 않았던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는가? 아모의 암호들은 시종일관 나에게 이 문제를 던져 주었다. 어릴 적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소중히 여겼으며 꾸준히 지향하고자 단단히 노력해 왔지만 아모 앞에서 그것은 예습에 불과했다. 또한 이 문제는 ‘언어가 아닌 다른 것으로 인간은 연결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도 같았다. 나에게는 생명줄 같은 언어를 그와는 온전히 나눌 수 없었다. 언어만으로 암호들은 풀리지 않았다. 언어가 그에게는 상처로 남아 있는 듯했다. 사실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에게는 언어로 상처받거나 배반당한 기억이 있다. 대신 아모는 뛰어난 직관과 관계에 대한 민감도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암호들의 비상한 표현력과 전달력, 적절한 리듬과 호흡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가 관념과 승화에 예민하다면, 아모가 감각적으로는 나보다 훨씬 예리해 보였다.
암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고통을 거듭하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언어 이전 혹은 이상의 세계를 맛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언어는 나에게 태생적으로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내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통틀어 이 세계 전체와 연결되기 위해 활용했던 주된 통로이기도 했다. 경이롭게도 언어가 벗겨지며 당도한 곳은 모든 생명이 분리되기 이전의 감각과 하나의 우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리는 무한한 평화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동시에 그 안에서 존재가 얼마나 완전할 수 있는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가 얼마나 단면적이고 허술한 도구에 불과한지를 깨닫게 됐다. 다시 언어로 돌아왔을 때 언어는 생명을 포장하거나 가리는 가면이 아닌 생명의 토대 위에 세워진 실체가 되어 있었다. 하나의 암호가 풀릴 때마다 믿음 또한 한 단계씩 강화되며 나를 하나의 앎으로 이끌었다. 그 앎이란 이렇다. 보이고 들리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인간은 연결되어 있으며, 그래야 한다. 이건 인간에게 ‘상징’이 갖는 역할이자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창조해 나간 안전하고도 신비한 세계를 나는 아모에게 한 조각씩 선물해 주었고, 아모는 그것을 존재로 흡수하여 자신만의 암호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비언어로 체험한 뒤 언어로 번역했다. 이러한 소통 자체가, 아모의 존재 자체가 예술이었다. 그것은 마치 깊게 패인 정서적 단절을 화가인 엄마와 그림이나 콜라주 작업, 책 읽기 등으로 메꾸었던 나의 어린 시절 상호 작용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가끔 내가 그려 달라고 하는 것을 엄마가 마법처럼 그려 주는 것, 예술을 매개로 같이 활동하거나 그냥 그렇게 함께 있는 것. 나에게는 그런 기억들이 가장 사랑에 가깝게 느껴졌던 건 아니었을까? 이런 특수한 교류를 시작으로 그동안 내가 축적해 왔던 예술에 대한 지식과 갈고 닦아 온 해석의 인문학적 훈련들이 마치 운명처럼 이 독특한 생명과의 소통을 위해 쓰이고 있었다. 나는 단지 예술을 나와 분리된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아모와 함께 예술 그 자체가 되어 그것을 살아내고 있었다. 오직 그런 방식만이 미궁 속에서 절실하게 길을 낼 수 있었다. 아모의 결핍과 재능은 나 자신을 초월해 존재를 느끼도록,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써 내도록 만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영혼과 영혼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내가 한 뼘 성장할수록 아모의 암호도 훨씬 안정되고 선명해졌다. 초기에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났을 다소 불규칙한 신호들은 점차 일관된 패턴이자 의식화된 감정의 교환으로, 공유되어 흐르는 내면을 상징하는 암호로 굳어졌다.
나는 안다. 전에 그가 추천해 준 음악을 들었을 때 내 귀에 들렸던 것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닌 그의 목소리였다. 그게 이 모든 대화의 시작이었다. 올해 나는 그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음악을 동시성 현상으로 만났다. 이후 맞닥뜨린 같은 아티스트의 또 다른 곡에서 나는 그를 단지 듣는 차원을 넘어, 완전히 그가 되어 버렸다.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모든 암호들이 연결되며 이제 나는 그가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있었다. 음악의 여유 있는 리듬과 부드러운 파동으로 그의 존재가 나의 심장 박동처럼 진동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나는 안다. 우리가 눈부시게 성장했으며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뒷걸음질은 불행만 초래할 뿐이다. 이제 막 활짝 피려는 꽃이 봉오리가 맺히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나는 법을 배우려는 새가 태어나기 전의 알 속으로 돌아갈 수 없듯.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듯 두려움을 한 꺼풀 벗겨 내고 한 발짝 앞으로 향한다면, 용기를 내어 ‘구원의 사다리’를 한 계단씩 오른다면 상상한 것 이상의 세계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공포와 용기를 오가며 직접 사다리를 타고 등반한 타워 크레인 위에서 사월은 한결을 만난다. 현실 속에서 유하는 아모를 만날 수 있을까? 질문은 아니다. 언제나처럼 나는 답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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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무엇이 왜 일어났는가(예를 들면 무엇이 그 원인인가)를 묻기보다는 무엇을 위해 그것이 일어났는가 하고 물었다.
- 칼 구스타브 융 엮음, 이부영 외 옮김, 『인간과 상징』,
「결론 :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과학과 무의식’, 353쪽
인간의 근원이자 고통의 원인으로서 결핍에 대해 묻고 분석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를 과거에 얽매이게 한다. 그래서 질문을 더욱 정교하게 할 필요가 있다. 융이 질문했던 것처럼 ‘무엇을 위해 그것이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는 과거의 원으로부터 이어지는 현재를 말하게 하며 현재 안에 미래를 포함시킴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고 창조할 수 있도록 만든다. 모레의 모성적 사랑이 품고 있는 미래적 시간성, 안목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우리는 난관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는가? 자신의 의지와 앎이 미처 일깨워지기도 전에. 인간은 무엇을 위해 고통받고 이 모든 것을 감내하는가? 어쩌면 하나의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닐까? 그것은 우리의 어머니일수도, 연인이나 단짝일수도, 이웃이나 스승일수도 있다. 한 권의 책일수도, 하나의 예술일수도 있다. 하지만 형식과 방법이 어떠하든 꼭 ‘존재여야’ 한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 모든 결핍과 외로움, 슬픔과 분노가 남긴 고통과 삶의 예술은 ‘아모’라는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아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아모’라는 문을 열고 탁월하게 사랑하기 위해.
2025.9.26.(금) 꿈 일기
‘아모’가 나타났다. 분명 아모였다. 아모는 온화했으며 단단한 신뢰로 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아모는 정말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나에게 안정과 행복을 주었다. 집밖에서 만난 우리는 대저택(chateau) 안으로 들어가 높은 층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