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나라, 상처받은 개인.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트라우마적 사건들로 붕괴되어 가는 기존의 사회 체제 속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것, 그러므로 되찾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과거에 대한민국은 끊임없이 외세로부터 침략당하고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봐야 하는, 개인성을 억압하며 목숨을 건 채 타자와 집단의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어야 하는 절박하고 열악한 조건 하에 놓여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방식만이 유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불타는 고통, 분노와 슬픔, 적대 등의 치열한 감정들은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제는 외부가 아닌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내면의 세계를 열어 보아야 할 때라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터무니없이 값이 올라가는 물리적인 집 한 채를 기꺼이 소유하는 일보다도 정서적으로 안전하게 지지받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내면의 집’, 내 안의 사랑을 보존시키고 가꾸어 나가며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과 세계의 안위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내면의 성소’를 마련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 온 사회 안에서 꿈과 환상, 상상과 사색, 직관처럼 개인으로부터 솟아나는 내면적 활동들은 사치스러운 것, 허무맹랑한 것, 혹은 아예 존재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어릴 적 상상하거나 글쓰기를 좋아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것을 애정하며 자신만의 꿈을 간직하다가 부모나 사회로부터 폄하와 멸시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꺾인 경험을 갖고 있다. 단순히 꿈이 없다는 말로 표현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꿈이 자라날 수 있는 내면적 토양 자체가 부재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적 정의만 보아도 ‘몽상(夢想)’은 ‘꿈속의 생각’이라는 뜻과 더불어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몽상’이야말로 지금까지 나를 살린 결정적인 행위였고 실존으로서의 나 자신을 세운 힘이었다. 몽상을 적극적으로, 무엇보다 '제대로' 하면 할수록 그것이 현실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것 역시 하나의 살아 있는 현실이며 거대하고도 역동적인 삶의 중요한 일부임을 알 수 있었다. 단지 해독하고 이해하는 데, 그런 기술과 경험을 익히는 데 시간과 에너지가 들 뿐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면의 집, 내면의 성소를 건축하고 실현하는 데 가장 필요한 토대였고 기예였다. 무엇보다 허황된 생각이라도 실행에 옮겨 버리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새로운 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에 대해 꼭 모두의 지지를 받을 필요도 없다. 소수만이라도 그 세계를 믿는다면 그것은 살아서 약동하는 실체가 되며 점차 더 많은 생명들을 끌어당기며 지평을 확장해 나간다. 우리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자 우주, 그런 어마무시한 씨앗을 안에 품고 있는 존재들이다.
몽상은 무의식의 언어이자 억압된 진실의 경로로 활약할 수 있다. 경쟁, 적개심, 분열, 자살, 정체성 혼란과 같은 우리 사회의 고통은 대부분 무의식의 집단적 억압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몽상은 꿈과 마찬가지로 이 억압된 무의식의 진실을 상징과 이미지로 전달한다. 감정을 배제한 이성은 오히려 역사적 트라우마나 집단의 깊은 상처를 정면으로 보고 핵심을 짚어내는 데 한계를 갖는다. 반면 몽상은 ‘논리의 문’을 우회함으로써 내면 깊은 곳에 닫혀 있던 감정과 기억들을 비교적 부드럽게 드러낸다. 칼 융이 말했듯, 집단무의식은 상징과 이미지로 말한다. 몽상은 개인이 집단무의식의 흐름에 접속할 수 있는 하나의 ‘주파수’다. 몽상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무의식의 상처와 역사를 안전하게 꺼내는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몽상은 분열된 자아와 집단정신을 ‘상징 공간’에서 다시 연결한다. 현재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나라의 상황처럼 개인의 내면과 사회의 여러 층위가 분열된 상태에서는 직접적인 대화와 논리만으로는 치유가 어렵다. 왜냐하면 감정의 근원이 언어 이전의 층위에 있기 때문이다. 몽상 속에서는 현실에서 단절된 자신과 타인, 과거와 현재, 의식과 무의식이 꿈속의 집이나 신화적 존재처럼 상징적인 장면, 이미지, 서사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재연결된다. 이 과정은 심리적으로 ‘내면의 성소’를 만든다. 분열된 자아나 역사적 트라우마가 상징 공간에서 안전하게 재현되고, 수용되고, 변형될 수 있는 장이 열리는 것이다.
이에 더해, 몽상은 적개심 아래에 묻힌 사랑의 에너지를 복원할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말했듯,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 심지어는 나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결정적인 벽을 만드는 적개심의 근원에는 연결되고자 했던 사랑이 숨어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감정이 왜곡되고 상처로만 남아 있다. 몽상은 이 감정들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고, 상징과 직관을 통해 부드럽고 안전하게 ‘다시 느끼도록’ 한다. 이를 통해 마음은 감정의 근원을 생생하게 체험하면서도, 현실의 위협 없이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즉, 몽상은 곧 사랑의 원형으로 다시 접속하는 주파수가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의 회복이야말로, 적개심과 분열을 넘어서는 진짜 통합의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몽상은 개인과 집단의 영혼을 다시 ‘이야기’로 엮는다. 트라우마와 억압은 언제나 ‘말해지지 못한 것들’이다. 몽상은 그것들을 이야기와 서사, 예술로 변환할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 몽상을 통해 떠오른 이미지와 직관은 예술 작품과 집단적 신화로 전환될 수 있다. 이 전환은 단지 예술 행위가 아니라, 집단의 무의식을 말하게 하는 정신적 통로의 개방이다. ‘몽상의 열쇠’를 통해, 상처받은 개인과 나라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작업, 그건 곧 새로운 신화를 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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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이 나를 어떻게 살렸는지로 다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원가정에서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받았다. 하나는 정서적 단절과 불통, 하나는 그 결핍과 고통을 풀 수 있는 열쇠로서의 예술과 꿈, 몽상이었다. 우리집에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몰랐을 뿐이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우리들의 꿈나무’라고 부르곤 했다. 그들이 꾸는 꿈에는 제한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했다. 그 이면에는 충족되지 못한 사랑이 내어 준 존재의 절실함이 있었다. 그들은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결여를 각자 자신에게 내밀한 방식으로 뛰어넘고자 전력을 다한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교회에, 아빠는 일터에 자신들만의 성소를 세웠다.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 그들은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엄마는 신과의 뜨거운 사랑을 통해 내면의 강력한 믿음을, 아빠는 빠르게 발전해 나가는 기술에 대한 존중으로 사회적인 성취를 일구어 냈다.
하지만 정작 가정에서 성소는 세워지지 못했다. 그것은 부모님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적인 한계였다. 각자 내면의 집과 성소를 짓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예정된 운명 같은 것이었다. 부모님은 많은 것들을 눈에 보이는 것들로 채우려 했으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항상 비어 있었다. 동시에 그들 자신도 미처 몰랐지만 우리를 살게 했던 것들이 있다. 새벽부터 일을 나가는 아버지와 예배하러 가는 어머니의 바스락거리는 부지런함,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창밖으로 조심스레 내보내는 아버지의 손길, 절실한 기도 중에 콧등을 타고 흐르는 어머니의 눈물, 꿈을 내어 준 그들의 별 같은 눈빛. 나는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많은 고통과 깨어짐, 죽음과 태어남 뒤에 나는 그들과 같은 길 위에, 그러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짙푸른 새벽, 나는 그토록 원하던 내면의 집과 성소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