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도, 복원된 모성의 권위 모레, 그리고 나를 혼란으로 뒤흔드는 아니무스에서 사랑의 상징으로 성장한 아모. 이 문들을 지나 진정한 사랑과 연대로 나아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정교하게 분해하고 정리해야 할 마음이 남아 있다. 내 안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던 칠흑 같은 비밀, 무심코 알고는 있었지만 차마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었던 곳. 바로 분노나 한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용암 같은 피로 들끓는 적대감이다.
내 영혼의 본질은 분명 생명에 대한 투명한 사랑과 지지에 있다. 그것은 매혹적이면서도 살벌했던 나의 모든 내면 여정을 통틀어 틀림없이 확신하고 믿게 된 진실이다. 이 중심이 없었다면 나는 완전히 무너졌을 것이고 일찍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본질의 주변을 자꾸만 맴도는 불길이 있었다. 그것은 뱀처럼 내 영혼의 중심을 돌고 돌며 혀를 날름거렸다.
사랑에 대한 나의 왕성한 기대와 잠재력은 엄마와의 관계에서부터, 무의식적인 차원에서부터 어그러졌다. 그것을 회복하고 활성화시키는 것은 오랫동안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 사실이 나를 정말로 슬프고 화나게 만들었다.
"내가 보여?"
최근 식사 자리에서 나는 부모님에게 물었다. 여전히 따뜻한 눈 마주침 한 번 보낼 수 없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나는 동생처럼 자식으로서 더이상 엄마 아빠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식인 나는 예전에 죽었다고 했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자식으로 부모님을 대했다면 나는 한참 비뚤어졌거나 이 관계를 유지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기존 가정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을 개조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고통이 소요됐다. 죽고 다시 태어난 나는 이제 부모님을 존재 대 존재로 대면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팠던 과거를 정리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아빠는 나를 만나면 머리가 시원해진다고 했고, 엄마는 나를 만나면 웃게 된다고 말했다. 나도 부모님을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게 좋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한다. 나는 본성대로 그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분위기 좋은 음악을 틀고 축복과 지혜의 말들을 쏟아 낸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달콤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기도 한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어린 날들처럼 내 감정을 잔뜩 억압했다가 분출하는 것을 우선에 두는 방식은 아니고, 철저하게 단련한 인식과 선택에 의한 우리 모두의 장기적인 안위를 위해서다.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내 안 깊은 곳에는 가시지 않는 씁쓸함, 참을 수 없는 비통함, 절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완고한 적대감이 도사린다.
가정 안에서 나는 억눌리고 양보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인식력이 강하고 이해심이 깊은 아이라고 했다. 자라면서 터져 나오는 동생과 부모님의 감정을 위로하고 공감했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시작했을 선행이 점차 강요된 역할로 당연하게 자리잡았고 정작 내 안의 슬픔이나 분노는 묻히고 잊혀졌다.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얘기는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내가 나를 지키려 했을 때 나는 어느새 집에서 ‘이기적으로 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의 고통을 이야기해 보려 하면 경청이나 수용 대신 매번 각자의 괴로움에 대한 분통이나 비애로 돌아갔다. 교감이나 소통 대신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가림막이 있었다. 이 모든 고통과 불통의 근원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작년 외할머니의 생신날, 나는 맞은편에 앉은 엄마와 할머니가 대화하는 장면을 또렷이 지켜봤다. 엄마는 옆에서 살뜰하게 외할머니를 챙기는 중이었다. 그런데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엄마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엄마의 존재에 주목하지 못했다. 약 올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무심한 할머니는 엄마의 상처를 자꾸만 건드렸다. 엄마의 분통에 다른 가족들이 슬슬 눈치를 봤다. 어릴 적에 나는 엄마가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보니, 가족 중에서 엄마는 자신의 감정을 가장 잘 알아차리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감정은 너무도 정당한 것이었다. 엄마는 마치 이렇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내가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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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의 관점에서 인간의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 두 층으로 나뉘어 있다. 개인 무의식에 개인 경험, 억압된 기억, 감정, 욕망 등이 저장되어 있다면, 집단 무의식은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원형적 구조, 상징, 이미지를 포괄한다. 우리가 개인 무의식을 깊이 탐구하고 통합할 때 집단 무의식과 연결되는 통로가 열린다. 특히 ‘자기(Self)’와의 만남은 곧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의 접점을 경험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이 지점에 서 있다.
나는 내 안에 피어나는 적개심을 인정하거나 제대로 직면하지 못했다. 그것은 내 의지로 자라난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어두운 마음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이 억울했으며 끔찍했다. 나는 윤리적인 기준과 이상점이 과할 정도로 높은 사람이었고, 그런 기준을 타인에게 알게 모르게 들이밀기도 했다. 겉으로는 티를 내진 않았지만 상대가 기준에서 벗어나면 그 사람으로부터 조용히 멀어졌다. 어쩌면 그것은 꺾여 버린 사랑을 복구하려는 나만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 대한 어둠을 한 켠에 품고 있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악인’인가? 적개심은 ‘나쁜 마음’인가?
인간이 가진 적대감의 실체를 해부해 보면 그 중심에서 상상 이상의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근원에는 사랑의 씨앗이 있다. 이것이 짓밟히고 방치되었을 때, 그러니까 사랑받고 싶은 마음, 사랑하려는 의지가 좌절되었을 때 그 고통은 아이에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 된다. 이 고통에 휩싸여 있을 때 "내 사랑은 좌절됐어!"라고 또박또박한 말과 제정신으로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아야 마땅할 대상을 적대한다. 내가 짓눌리고 거부당해서 슬프고 화난다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너무도 괴로우니 스스로를 감추며 사람과 세상을 미워하는 것으로 마음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트집을 잡으며 공격하거나 버럭 화를 낸다. 냉소적으로 흘겨보거나 비꼬거나 교묘하게 까내린다. 거리를 두고 침묵한다. 임시적인 친절이나 웃음으로 가린다고 해도 결국 어두운 마음은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어떻게든 드러날 수밖에 없다.
혹은 타인을 파괴할 수 없으니 나 자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내 경우가 그랬다. 나의 인생에서 적대는 관계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거리감이나 점차 깊어지는 우울 등으로 드러났다. 또한 내 것으로 차마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런 불순한 마음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폭발적으로 표현하곤 하는 엄마나 동생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참혹함을 압도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덮고 싶었다. 너무도 그러고 싶었다.
적개심은 나 개인만의 사적인 감정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들이키고 내쉬는 환경이자 공기에 가깝다. 현재 우리는 심각한 국가적 재난 속에 처해 있다. 그것은 정신적 위기와 사건 사고, 개인의 내면과 외부 현실 모두에서 어김없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은 20년 넘게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유지해 왔다. 10~40대의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는 것이 자살이며, 하루 평균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에서 성형 수술자가 가장 많은 국가이며, 저출산과 결혼율 하락에 시달리고 있다. 사랑의 가치를 굳건하게 지키고 생명을 지지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열악하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이 나라를 "지옥"이라고 표현한다. 이 위기의 핵심은 우리가 서로를 적대한다는 것,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밑바닥에는 아주 깊고 오래된 집단적 · 역사적 트라우마가 깔려 있다. 가장 강력하게는 존재의 가치가 외부에 의해 결정되는 식민지 경험을 겪었다. 일제강점기(1910~1945)는 단순한 정치적 지배가 아니라 정신적·정체성 모두에서 식민화였다. 언어, 이름, 역사, 문화가 억압당했고,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은 상태에서 ‘제국의 눈’으로 자신을 평가당하는 걸 학습해야 했다. 이 시기에 깊게 각인된 건 외부 권력에 의해 평가되고 승인받아야 생존한다는 감각, 나는 내 힘으로는 존중받을 수 없다는 존재의 근원적 불안이었다.
다음으로,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근본적인 안전이 붕괴되고 집단적 불신이 증폭됐다. 1950~53년의 전쟁은 단기간에 엄청난 생명 손실과 사회 붕괴를 일으켰고, 이후 분단이 고착되면서 ‘끊임없는 위기 상태’가 일상이 됐다. 당시 사람들은 기본적인 생존 안전망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경험과 동시에 이념의 문제로 가족, 이웃 간에도 서로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세계를 상실했다. 이후 60~80년대 산업화는 짧은 기간 동안 생존을 위해 전 국민이 내면을 묻고 전진해야 했던 시기다. 정권은 국민을 근면한 노동자, 효율적 톱니바퀴로만 다뤘고, 감정 · 예술 · 자기표현은 사치로 치부됐다. 독재 시기에 개인의 감정과 내면은 억압됐고 성취나 외적 성공에 집중하도록 강요됐다. 이때 감정 표현과 돌봄의 전통이 단절되었으며, 개인보다 집단, 자아보다 역할(페르소나)을 중시하는 경향이 대두됐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트라우마들이 단순히 과거에 발생한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세대 간에 무의식적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꼭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들처럼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연도를 달달 외워야만 역사를 아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모님의 말투와 어조, 눈빛에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의 정서를 읽어 내고 흡수한다. 학교의 경직된 교육 체계, 선생님의 영혼 없는 수동적인 가르침으로부터는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지워 내고 타자 중심의 시선에서 비교하고 경쟁하는 식민지 세대의 불안정한 경험을 답습한다. 지금 세대가 구체적인 사건을 모른다 해도, 설명할 수 없는 불안 · 열등감 · 죄책감이 몸의 감각으로 남아 평생을 따라다닌다.
한국은 개인적인 자기상과 더불어 집단적 자기상마저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다. 즉,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뿌리와 상징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은 오랜 외세 간섭과 단절, 급격한 현대화 속에서 자기 문명에 대한 상징적 자의식이 충분히 성숙하기 전에 근대화가 이뤄졌다. 그래서 개인적 · 집단적 측면에서 모두 ‘우리가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에 대한 상징 체계가 불안정하고, 외부 담론에 민감하게 휘둘리는 경향이 생겼다. 이것은 지금의 정체성 혼란, 극단적 양극화, 자존감의 취약함과도 맞물려 있다. 내면의 중심이 없을 때, 외부 기준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은 개인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나는 묻고 싶다. 1945년과 1948년 8월 15일 이후 대한민국은 해방되었는가? 개인으로서 우리는 독립하지 못했으며, 과거에 우리를 옭아맸던 트라우마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