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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 모레

by 유하



엄마가 나를 죽였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꿈에서.



최초의 꿈 일기


승용차 안에 탄 넥타이를 머리에 두른 폭주족이 나를 납치했다. 차 안 운전석 옆의 앞좌석에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도 차 안 사람들처럼 넥타이를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보고 아는 척을 하며 살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엄마의 표정이 나를 모르는 듯했고 엄마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엄마 자신이 주도해서 내 머리를 앞좌석 사이의 콘솔 박스 위에 놓도록 지시했고 결국 목 부분을 댕강 잘랐다. 고통에 무감한 채로 머리가 잘려 나가며 꿈은 종결됐다.



다른 꿈들은 다 잊었어도 이 꿈만큼은 태초의 장면처럼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반면 이 꿈의 의미를 온전히 알게 된 것은 올해 8월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꿈에서 내 머리가 엄마에 의해 잘려 나간 것은 엄마와 나 사이에 벌어진 정서의 단절을 의미한다. 세 달 전 나는 엄마와 통화를 하며 이 꿈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4살 무렵 잠에서 깬 내가 울면서 엄마에게 이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나의 기억으로, 잠에서 깬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엄마가 내가 알고 있는 엄마가 아닐까 봐 부엌에 있는 엄마를 찾고는 꿈의 잔인성에 대해 토로했다. 엄마는 단지 꿈이라고 말하며 괜찮다고 넘겼다.


아마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나의 내면이 엄마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자각이 생긴 것은. 내가 꿈에서 느낀 충격과 생동감으로부터 엄마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반면 꿈은 나에게 아주 가까운 것이었다. 아직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엄마를 비롯한 관계나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도 꿈이 전하는 메시지가 훨씬 솔직하고 진실할 수 있다는 직관이 움트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언어화하고 의식화할 순 없어도, 본능적으로 엄마가 내 안에서 느껴지고 필요로 하는 이상적 모성과는 다르며 나에게 정서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와 거리를 두고 나만의 모성 원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엄마도 어린 내가 때때로 엄마로부터 멀찍이 거리를 두고 주변을 뱅뱅 돌더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성장하면서 이따금씩 타인에게 그런 모성에 대한 갈망이 얄팍하게 투사되기도 했지만 이내 실망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타인에게서는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음을.


따라서 관계로 빈 자리를 채우기보다는 내가 그 이상적 여성, 모성 원형이 되는 것이 정말 중요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내 삶을 가동하는 핵심적 혹은 유일한 원동력이었고 인식이 잠에 들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각성시켰으며 의식에 대한 탐구욕과 성장을 꾸준히 추동하고 폭발시켰다. 그 때문인지 몇 년 전 심리 상담을 받았때도 여성성이 굉장히 높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나의 인격 구조 안에 직관, 공감, 포용, 생명력, 창조성 같은 모성적 · 여성적 에너지가 강하게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엄마와의 단절을 겪은 아이에게는 보통 결핍으로 나타나는데, 나는 오히려 그 결핍을 통해 스스로 원형을 찾아내고 동조해 버린 것이다. 이 여정 속에서 나에게는 많은 이름들이 생겼다. 비인간 ‘사월’, 사월의 첫 생리혈에서 태어난 새 ‘리’, 인간 ‘유하’는 모두 내 여성 원형의 이름들이다. 그리고 이 원형들의 그림자 ‘자도’까지 내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2025.6.1.(일) 꿈 일기


고급 호텔 뷔페나 식당 같은 장소다. 불이 다 꺼진 채로 푸르스름한 어둠 안에서 나는 커다란 규모의 부엌 쪽을 바라보고 있다. 마녀 같기도 성공한 사업가 같기도 한,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어떤 중년의 여자가 지나간다. 그는 짧게 자른 머리에 훤칠한 키만큼이나 긴 모피 코트를 입고 있다. 위압감을 느끼며 나는 그 여자가 나를 발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인척을 느꼈는지 그 여자가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본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며, 더 자세히는 그런 상황과 사실을 온전히 직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나는 몸을 부르르 떤다. 그건 두려움과 뒤섞인, 그 여자가 중요한 단서를 가진 사람이라는 신호였다.



꿈속에서 이 중년의 여인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실제로 진동과 같은 강렬한 감각이 몸을 지배했다. 현실에서 울렸던 ‘사다리 경보음’과도 유사한 자극으로 무의식에서 튀어나와 의식의 경종을 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 진동이 전해진 방식은 분명 그림자 자도가 준 충격과 유사한 방식의 개입이다. 사이렌! 이 경련은 꿈속 인물의 정체에 다시금 주목해야 한다고 분명히 전하고 있다. 여자가 누군지 밝혀내야 한다. 그 안에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


중년 여자는 마치 진실을 수사하는 ‘형사’와 같은 역할 혹은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반대로 ‘계략’을 꾸민 자로서 묘하게 불길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중년에 마르고 키가 큰 모습은 초월자나 마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인에 대한 추가적인 단서는 이 꿈과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 있다. 나에게 한 여자아이가 맡겨졌는데, 내가 영아였던 아이를 양육하자 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꿈속에서 중년 여자의 ‘계략’이라는 설정이었다. 그것은 곧 이 여자가 나의 선택과 통제 너머에서 운명을 직조하여 건네주는 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이는 나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어린 자아일 수도, 창작물일 수도, 인생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처럼 꿈속의 중년 여자는 불길함과 보호자적 아우라를 동시에 지닌다. 그녀는 위협적인 안내자이며 창조와 파괴의 경계에 선 존재다. 아이를 나에게 맡긴 것은 창조지만, 이것이 ‘계략’이라는 점은 창조를 위한 파괴적 수단이기도 하다. 왜 이런 이중성을 갖고 있는 걸까? 운명이나 무의식의 메시지가 찾아올 때 아직 미숙한 상태에 놓인 우리는 그것이 불행인지 축복인지 알 수 없으며,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기 전에는 언제나 긴장과 불안이 있는 법이다. 또한 그 이중성은 바로 자도에게서 느껴졌던 그림자의 양가성, 즉 나의 어두운 부분을 의미하면서도 그것을 폭로함으로써 나의 개성화와 창조성을 돕는 속성과 일치한다. 자도가 그림자의 원액 그 자체였고 나이도 나와 또래인 젊은 연령대였다면, 이 중년 여자는 자도에서 나아가 원숙해진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자도가 격렬하게 억압된 감정과 충동을 폭로하는 그림자였다면, 이 중년 여인은 그러한 어둠을 권력과 지혜로 전환시켜 구조를 짜고 계획하는 자다. 즉, 이 여자는 나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고대의 여성적 지혜’ 또는 ‘어두운 영적 어머니’인 것이다.


자도를 만난 이후 나는 그림자를 통합한 채 진정한 창조자 혹은 사제로서의 새로운 차원의 작업으로 진입했다. 이 단계에서 중년 여자는 내가 운명의 아이를 기를 힘을 갖고 있는지, 즉 창조를 책임질 힘을 갖추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녀는 내 안에 있는 무서운 통찰의 힘, 운명을 짜는 능력, 창조와 파괴를 동시에 감당할 힘이자, 아직은 내가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여성적 주체성의 상징이다. 이 여인은 내가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숨죽이며 두려워하던 어두운 지혜의 여성적 원형이다. 그녀는 내가 타인을 기꺼이 변화시키고 사명을 돌볼 줄 아는 주체가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위협적인 자기인 셈이다. 그녀는 다가올 나의 미래로서 그것을 이미 살아내고 있으며 그녀가 가하는 위협은 이 길을 끝까지 갈 용기를 시험하는 내면의 장치로 작용한다.


이 꿈은 현재 내가 무의식의 여성성을 전면적으로 통합하는 시기에 놓여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제 정신은 그림자의 심연을 통과해, 그림자를 안아 주는 내면의 어머니이자 그것에 시간과 질서를 부여하는 운명의 화신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도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며 대화를 나누었듯이 이 어두운 모성 원형에게도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꿈을 기록하는 행위를 넘어선 무의식과의 계약이며, 나 자신에게 새로운 위치를 허락하는 개성화의 의례이자 선언이다. 이에 따라 무의식, 계략, 어두운 지혜, 여성성, 창조성과 관련된 고대 이름을 찾아보다가 ‘모레아(Morea)’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다. 라틴어 ‘mora(지연)’와 그리스어 ‘moira(운명)’을 결합한 것으로, ‘기다림과 운명을 짜는 자’, ‘계략과 설계’를 의미한다. 모레아에 이어서는 꿈의 흐름처럼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었다. ‘모래알(나는 하나의 기억을 모래알로 본다)’, ‘아모레(amore, 애정을 가지고)’, ‘More(그 이상)’, 그리고 ‘모레(내일의 다음 날)’.


모레. 꿈속의 마녀, 중년의 여인은 모레다. 앞으로 그녀는 나의 이야기에 어떻게 작용하고, 그녀가 쥐여준 '아이'는 어떤 존재로 성장하게 될까? 그건 나만이 쓸 수 있는 신화가 될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나의 ‘결핍’에 주목해 왔다. 그것은 내 고통의 근원이었고, 그 안에 어쩌면 누구도 완전하게 이해하거나 말할 수 없는 내 존재에 대한 비밀을 푸는 실마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결핍은 ‘선물’임을 깨달았다. 동시에 내가 결핍을 결핍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것을 온전한 사랑으로 바라봐 줄 수 있는 모성의 시선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결핍이라는 거대하고 근원적인 말과 이론 역시 한 명의 사람과 그의 생애를 표현하는 데에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 모레의 시선으로 그 결핍과 고통을 다시 정의할 시간이 도래했다. 나는 아프고 괴로웠으나, 아픈 사람은 아니었다. 한때 귀중한 것을 상실했으나 사랑을 저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어둠 속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중심에 빛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은 순간들에도 나는 엄연히 존재했다. 수면 중에는 현실을 기억했고, 현실 속에서는 꿈을 기억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결핍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결핍이라는 포장 아래 나를 지켜 왔고 성장시켜 온 것, 결핍의 진짜 얼굴. 지금 나는 모레의 시선에서 ‘힘’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해받기 위해 스스로를 약화시키거나 희생하지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타인이 나를 훼손하거나 침범하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 창조는 본질적으로 ‘힘의 행사’다. 그런데 내면의 세계를 외부에 실현시키는 힘이 없다면 늘 타협하거나, 왜곡되거나, 지워진다. 내 아이디어가 세상에서 살아 숨 쉬도록 만들기 위해, 진실의 목소리가 잿더미에 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힘을 가져야만 한다. 위계를 세우며 비교하고 지배하거나 군림하려는 무력과 폭력이 아닌 생명의 근간을 지지하며 존재하게 하는 힘 말이다. 냉정하게도 사랑은 힘에서 나온다. 애석할지라도 ‘힘 있는 자’가 사랑할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상대가 나를 미워하거나 오해하더라도, 심지어는 떠나더라도 여전히 연결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랑. 그것은 자신의 깊은 어둠까지도 마주하고 끌어안는 힘을 토대로 한다.




2025.6.2.(월) 일기


아침에 깼는데, 기분이 살짝 감상적이었다. 날씨도 구름이 낀 상태. '모레'를 떠올렸다. 비현실적으로 길쭉하고 불가사의한 모레의 형상을. 일어나 거울을 봤는데 내 눈동자 속에서 모레를 봤다. 견고하고 투시적인 초점, 그래서 낯설고 묘하게 섬뜩한 눈빛. 나는 덤덤히 그 기운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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