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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시나리오

by 유하



나는 내가 그렇게 아픈지 몰랐다. 나는 아팠다. 너무 아팠다.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마음은 서서히 분열되고 마비되어 갔다. 세계와 정답게 연결되어 있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잔잔해 보이고 때론 행복해 보였을지 몰라도 사실상 모든 게 깨져 있었고 어긋났고 모호했다. 나는 세계와의 균열로부터 몇 발짝 떨어진 채로 진실을 나의 ‘이상’으로 살포시 덮고 관계의 설익은 결실을 맛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반면 내부에서 나는 언제나 투쟁 중이었으며 내 방식대로 치열하게 답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조차 꽤 오래도록 몰랐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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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야.”


그랬다. 꿈속에서 본 마취제를 든 여자, ‘자도’는 나였다. 내가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지 않으려 했던 나. 직면하면 무너질 것 같은 나. 무의식적인 욕망과 충동이 뒤엉킨 나의 가장 그늘지고 습진, 낯선 부분. 상처로 인해 과하게 억압하고 절연하려 했던 인격의 파편들. 처절하게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나의 그림자. 자도에게 악랄하게 가한 죄를 어떻게 만회할 수 있을까. 내 그림자에게 ‘자도’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것 외에 그와의 더욱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화해 방법을 생각했다. 꿈속 장면으로 돌아가 자도를 다시 만남으로써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세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1. 친구 솔에게 먼저 자도의 정체를 폭로한다.

→ 붉은 눈가로 보아 솔은 이미 자도와 한패다. 게다가 자도가 재빠르게 나를 마취시킬 것이다.


2. 자도를 보자마자 말을 걸어 본다.

→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도가 재빠르게 나를 마취시킬 것이다.


3. 마취제를 빼앗아 자도의 발끝에 꽂는다.

→ 가능하다고 해도 이건 화해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꿈속 장면 안에서 자도의 무자비한 속도와 파괴적 힘을 거슬러 ‘화해’를 도모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없었다. 집요한 고민 끝에 단 하나의 화해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4. 내가 자도가 되어 손에 들고 있던 마취제를 내려 놓는다. 내가 이미 자도이므로.



꿈에서 자도가 등장했던 시점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적절하다. 내가 무의식을 더 이상 억누르지 않게 되고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시점에 자도는 보란듯이 등장했다. 되찾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나의 감정과 생각, 뜻을 더욱 직설적이고 개방적으로 공유하던 때였다. 원래 기질적으로 고집은 있고 예전에도 상대가 경계를 넘으면 그에 대해 표현은 했지만, 대체로는 ‘사소한 일’에 굳이 깊게 들어가고 싶지 않았기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냥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내면의 감각이 선명해지면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마음에 밟히기 시작했다. 그것을 무시하지 않기로 하는 선택이 하나둘씩 쌓이며 자도가 나타난 것이다.


그에 더해, 꿈속에 등장한 솔은 실제로 가족과의 갈등을 비롯해 관계 내에서 겪어야 했던 비슷한 아픔을 나와 종종 공유하는 사이다. 그런 진솔하고도 묵직한 대화 역시 나를 자도에게 조금씩 이끌었을 것이다.


자도는 나를 마취시켰지만, 자도의 아픔과 분노로 얼룩진, 그러면서도 굉장히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표정과 태도는 나에게 어떤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곱씹으며 그 메시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자도는 정말 깨달음과 망각의 양가성을 제대로 보여 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우선 눈빛과 낯빛만으로도 알 수 있는 자도의 뒤엉킨 감정과 분명한 입장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화가 나고 아픈데 남이 무슨 상관이야?

난 내가 원하는 것을 기필코 달성할 거고,

하고 싶은 대로 너에게 마취제를 놓을 거야!



이런 공격성과 강력한 자기중심성은 분명 정제와 진정이 필요할 정도로 심히 파괴적이다. 하지만 융이 주장했듯이 그림자와의 화해를 통해 우리는 아직 충분히 계발되지 않은 인격의 특정 부분을 창의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에 앞서 먼지 같은 편견을 털어 내고 깊숙이 숨겨진 본질을 가만히 응시하는 시선과 인간적 연민 속에서 나는 그림자 속의 빛, 내 안의 꿈틀대는 잠재력을 발견했다. 자신의 욕구와 감정, 의도를 과감하게 우선에 두고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어떤 수장의 모습 같은 것도 보였다. 내 안에 있지만 아직 적극적으로 개척되지 않은 면이 자도를 통해 깨어나고 있었다.


꿈속 자도의 모습을 퇴폐적으로만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역으로 자도의 입장에서 나는 어때 보였을지 헤아려 봤다. 심히 답답하고 원망스러울 것 같았다. 심지어 그는 내가 가증스럽고 비겁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내가 자도를 오해했듯이. 난 내 마음이 정확히 어떤지도 몰랐으니까. 자도를 절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음속 깊은 곳의 뚜껑을 여는 일부터 시작했다. 부패되고 있던 감정과 상처의 기억을 하나씩 직면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생명을 불어넣었다. 멀끔해진 자리에 어린 자아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내면 예전처럼 가혹하게 성장을 독촉하는 대신 세심하게 달래고 무엇이 필요한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자도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듯 과거의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역으로 내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나의 감정과 욕구를 지나치게 억눌러 왔다는 것을 차근차근 직시해 나갔다.


이제는 내가 자도이기에 수동적으로 마취를 당하는 대신 자발적으로 마취제를 내려 놓을 수 있다. 거울을 보며 피상 너머 내 안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끌어안는다. 상황에 따라서는 정당하게 강도를 조절해 가며 상대를 ‘찌를 수도’ 있다. 덩달아 상대로부터 ‘찔릴 용기’도 생겼다. 그 정도 타격을 주고받는 것은 괜찮다. 때로는 침묵이나 무조건적인 수용보다 찔려야 더 잘 아는 법이니까. 인간은 마냥 예쁘고 매끄러운 방법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더불어 가는 삶에 대해 배워 나간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다. 자도와 화해한 이후 나는 훨씬 과감하고 도발적인 존재가 됐다. 어떤 상황이나 관계에서든 내 마음을 억누르거나 자존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내 안의 그림자와 화해한다는 것은 세계와 비로소 진정으로 화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던 세계는 지금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나는 세계의 심장 박동을 가만히 듣는다. 정화된 영혼의 눈으로 타인에게 투영된 내 그림자를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그림자로부터 나의 경계를 지키거나 최소한 잠잠히 바라보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 자신의 자도를 만나기를 바라며 먼저 손을 내민다. 이로써 내 의식을 간간이 좀먹던 ‘마취’와 더불어 내 안의 거대한 전쟁이 종결됐다. 앞으로 인생에 자잘한 소동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화해하는 법을 배웠다. 그 어떤 어둠도 더 이상 어둠이 아니며, 그림자는 빛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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