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기도해?"
집에 들어오자마자 앤이 한 말이었다. “기도”라는 앤의 표현이 너무도 정확해서 나는 놀라며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동시에 안도했다. 내가 이곳에서 꿈꾸고 내뱉고 실컷 벌인 일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마음이 들어서.
가족으로부터 분가해 이 집으로 독립하기 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다. 분가하게 된 이유도 기뻐할 만한 계기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새 집으로 오고 한동안은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온전히 실감하지 못했다. 조금 익숙해졌을 때 서서히 떠오른 것은 잔잔한 평정이었다. 처음이었다. 그런 안정을 느껴 본 것은. 혹은 기억 너머의 기억 속에 가만히 잠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냥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이었다. 무엇을 애써 하지 않을 때, 비워 둘 때, 기다림조차 없이 조용히 호흡할 때 오히려 생명을 얻었다. 나는 공기처럼 물처럼 생각처럼 흘렀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올해 초에는 고요하지만 각별한 꿈을 꾸게 됐다. 나는 홀로 짙푸른 새벽 속에 있었다. 새벽은 하나의 집을 유유히 감쌌다. 물이 있는 풍경을 담은 널따란 창, 파란빛이 안팎을 구분하지 않고 온통 밀려들었다. 미니멀하고 현대적인 그 집은 실제 내가 거주하는 집과 닮아 있기도 하면서 수평으로 길게 규모가 컸고, 신비로우면서 미래적이었다. 집 안의 불을 키며 꿈은 끝이 났다.
집 안은 잘 정돈되어 있다. 나는 만족스럽다고 느끼며 안정적인 상태다.
나는 인식을 넘어 자신에게 부드럽게 확언한다.
“내 집이야.”
- 2025.2.23. 꿈 일기
파란 새벽의 집 꿈을 꾼 이후로 나는 두 가지를 결심했다. 하나는 꿈 일기를 써야겠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내 집을 잘 가꾸고 지켜 나가자는 결의였다. 그 집이란, 물리적인 집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실은 그보다도 ‘내면의 집’에 훨씬 가까웠다. 두 차원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꿈속에서 나는 확신했다. 내가 집에 있음을, 이곳이 나의 집이라는 것을. 그 믿음이 파란빛처럼 현실에도 스며들고 있었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은 내가 독립한 집에서 ‘만난’ 존재 중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렇다. 나는 몸과 마음을 정화시킨 새 공간 안에서 여러 헌신적인 예술가, 작가, 성직자와 더불어 그를 만났다고 고백하고 싶다. 융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저작들을 제대로 읽어 보기 시작한 것은 이 집으로 온 다음이었다. 마음에 있는 소명 하나만을 움켜잡고 가장 외롭게 내 길을 더듬거리던 시기에 그는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해 왔고, 어떤 일을 하고 있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일깨워 주었다. 나는 융이 말하는 ‘자기(Self)’의 부름에 따라 인격의 새로운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혼자가 아니었다. 한 번도 혼자인 적 없었다.
‘자기’란 인간의 인격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이다.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해 온전한 전체성으로 이끄는 궁극적 원리다. ‘자기’는 원, 만다라, 빛, 영적 인물, 신적 존재 같은 상징으로 나타나는데, ‘집’으로 체현되기도 한다. 파란 집의 꿈을 꾸게 된 것은 그다음에 일어난 엄연한 ‘사건’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집,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로이 경험하는 나. 파란 집에서 본 창밖의 물과 대기는 무의식의 밀물과 의식의 썰물 사이를 오갔고, 원형의 투명한 유리 탁자는 진실처럼 빛났다. 특히 중앙 거실이 부엌, 화장실, 다른 방 등이 위치한 1층보다 얇은 계단 아래로 살짝 파여 있는 독특한 구조는 마음의 중심이 기능적인 외부 활동에서보다 깊은 내면에 자리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어두운 밤을 지나 새로운 하루가 떠오르기 직전, 무의식과 신비의 새벽녘, 정화와 평화의 파란 빛깔 안에서 나는 벽면을 더듬어 두어 번의 시도 뒤에 동그란 스위치를 눌러 불을 킬 수 있었다. 몽롱한 꿈속, 나의 집에 대한 선명한 자각과 주권의 선언처럼 불빛은 어둑하던 내부를 노랗게 밝혔다. 꿈을 계기로 전에는 자잘하게 요동치던 두려움이나 불안이 사라졌다. 집에 있으니까. 나는 집에 있다.
이후로도 계속 내면의 중심과 귀속의 힘으로 이끄는 집의 상징들을 만났다. 그들은 문장으로, 노래로, 사물로, 꿈으로, 끊임없이 말을 걸어 온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천천히 음미하는 현인은 읊조린다. 간결하면서도 음악 같은 목소리로, 잎사귀 사이 흔들리는 햇빛 같은 어조로,
“집이야. 제 인생은 역할에서 영혼으로 변한 겁니다.”
“모두 서로를 집으로 바래다줍시다.”
- <Ram Dass, Going Home>(2017)
젊은 아티스트의 평온한 리듬도 들려온다. 단정하지만 전부를 내어 주는 맹세.
이제 너의 집이 되어 줄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
- Mac Ayres, <I'll be your home now>
이제 집에 초대할 차례다. 고요히 저마다의 밤길을 걸어온 이들을. 짙푸른 새벽, 우리 내면의 불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맞추어 보는 몽상의 주파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