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Green : 존재의 회복

사월에 꽃마리 피다 2025

by 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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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떤 자각도 없이, 우리는 세계에 던져진다. 한동안 나와 한 몸이었던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며 최초로 하나의 세계를 조우하고 그대로 흡수한다. 그것은 연약한 아이가 할 수 있는 순백하고도 유일한 사랑이다. 아이가 자라면 가정을 떠나 학교에 가고 친구들을 사귄다. 세상이 말하기에 좋고 가치 있다는 것들을 학습하고 분주히 따라간다. 내가 누군지에 대한 자의식이 생기며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도 생각하고 몽상에 잠기거나 제 몸보다 커다란 꿈을 꾸기도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많지 않다. 숱한 외부의 반대와 내적인 저항, 끊이지 않는 난관을 뚫고 나의 소망과 의지를 관철시킨다는 것이 상당히 두렵고 피로하게 느껴진다. 충분한 확신도 없고 괜스레 이기적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먹고 살아야 하니 직장을 구하고 때맞춰 이런 게 사랑일 거라 여기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 그렇게 일상을 바삐 살아가다가 문득 어떤 자각과 함께, 외로움과 공허가 스친다.


그리고 떠오르는 질문. ‘나’는 어디에 있을까? 이게 인생의 전부일까? 이대로 끝일까?


이런 질문은 불필요한 공상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 선명한 하나의 자각으로서, 어느새 두 눈과 귀가 멀어 버린 당신을 소리 높여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잊고 있던, 잃어버린 본래의 목소리다. 인간은 단순히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동물 혹은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에 그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불안은 외적인 안정을 추구하고 붙잡도록 만들지만, 삶의 본성 자체는 유한한 인간을 뒤흔들 정도로 무한하며 역동적이다. 우리가 때때로 등한시하거나 폄하하는 우울, 절망, 회의 혹은 슬픔이나 분노와 같은 여러 감정들은 인간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일 수 있다.


너무나도 많은 내적인 자원과 잠재력이 편의를 위한 현대의 기술과 발 빠른 서비스, 막대한 정보량과 이미지 홍수, 미디어가 제시하는 경직된 미적 기준과 성공 신화에 휩쓸려 길을 잃고 있으며 차분한 일상 속에서 지켜져야 할 존재로서의 고유한 리듬과 의미 또한 무너지고 있다. 우리 사회의 높은 분열과 자살, 상처의 그림자가 그 사실을 꾸준히 증언하고 있다. 특히 인간이 그토록 놀라워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해하는 AI는 우주와 연결된 인간 정신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생명이며 우리의 일부를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단지 그 효율과 속도를 좇기보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깊은 숨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인간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생물학적인 죽음보다도 삶 속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실존의 죽음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은 화려한 빛만 쫓아가거나 새까만 어둠에 매몰되는 대신 그 모두의 뜻을 알고 통합하는 데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새로운 자각과 생명의 빛이 재탄생한다. 개인적인 한계와 고통으로부터 마냥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직시하고 인식할 때 그것은 보편적인 이해와 연결로 확장되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어진다. 모든 인간과 인간의 생애는 환경적인 요건과 활동의 형식이 어떠하든 단연코 예술이다. 끊임없이 갈고닦아야 하며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해 나가야 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단편적인 판단과 단일한 평가 너머로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 현존하는 신성한 시간이다. 우리는 성숙해 나가는 씨앗이며 만개하는 꽃이다. 얕은 눈치나 엉성하게 뭉친 외부 기준으로 억누르는 대신 자신의 개별적인 특성을 믿고 인정하며 표현할 수 있는 자유. 비상한 상상력에 이어 신과 자연을 향한 풍부한 감수성. 죽어 있다고 여겼던 것을 뒤집어 생명으로 가꾸어 나가는 힘.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진짜 능력이고 인류를 넘어 세계를 다채로이 빛낼 수 있는 가치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오롯이 나 자신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이 시대의 많은 가정과 사회의 여러 집단은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토대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잃었다. 우리는 단지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현실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닌 필히 내면의 집으로 회귀해야 하며 각자의 성소를 세워야 한다. 고정된 현실이야말로 인간의 불완전한 시각이 투영된 일종의 폐쇄적 환상이며, 한계 안에서도 마음껏 사유하고 느끼고 꿈꾸며 시도할 수 있는 삶만이 완전하다. 우리의 마음속 나침반과 본능적 직관이 그러한 사실에 대한 생생한 증거다.


따라서 아낌없이 내 존재에 주목하고 질문해 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이 나를 살며시 미소짓게 하는지. 어떤 순간에 포근해지는 행복을 느끼며 가슴을 데우는 눈물이 나는지. 불편하더라도 솔직하고 진중하게 직면해야 한다. 권위와 윤리, 역할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들이 나를 얼마나 아프고 갑갑하게 했는지. 존재에 주목하지 않는 세상이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거나 외면했고 미루었던 그 모든 것들이 진정한 나와 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들이다. 아주 작고 미세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들. 나를 진짜로 살게 하는 것들. 아침에 나를 깨운 빛 한 줄기, 깊이 골몰하며 흘린 땀 한 방울, 하루를 돌이키며 마시는 향긋한 차 한 모금. 말간 글귀 한 줄과 한바탕의 봄꿈 같은 것들.



암흑에서 초록빛으로 움틀

모든 존재의 진실에 사랑과 경외를 표하며,


2025.11.4. 4:11 AM

사월에 꽃마리 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