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엄마에게 써 보는 편지
엄마,
오늘 엄마랑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서 가만히 떠올려 봤어.
어릴 적 기억들. 꽤나 긴 시간 동안 잿빛에 잠겨 있었는데,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채워지는 것만 같았어. 엄마가 그려 준 미키마우스, 함께 한 콜라주 작업. 물감 냄새. 장난스런 대화와 애정 어린 스킨십. 엄마랑 막내랑 숨바꼭질했던 기억, 음악을 틀어 놓고 신나게 춤을 췄던 기억.
나의 첫 번째 꿈은 엄마였어. 엄마처럼 예쁜 여자, 멋진 예술가, 힘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나의 일부는 언제나 엄마야.
엄마, 얼마나 외로웠어?
엄마는 많이 섬세하고 여리고 다재다능한 사람인데, 엄마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고 온전하게 바라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진정으로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어른이 주변에 없어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댈 수 없어서. 얼마나 원망스럽고, 고단하고, 허전했어?
최선의 노력 앞에서 우리가 결핍을 이겨 내지 못하고 모진 말들을 쏟아 냈을 때, 얼마나 속상하고 가슴 아팠어? 어쩌면 우리는 엄마에게 전부였던 만큼 유일하게 엄마를 인정해 줄 수 있는 존재들이었는데.
그런데 엄마, 그거 알고 있어?
우리 가족 모두 그 누구보다도 엄마의 행복을 바랐다는 거. 엄마의 분노와 고통 앞에서 어쩔 줄 모르기도, 슬프기도 했어.
엄마의 결여 이상으로 가족에게 성심성의를 다한 엄마의 인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고결한 인생에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와 아빠의 배려와 인내 덕분에 '나'를 찾으려는 여정에서 배운 것은 그런 거였어. 사람은 개인의 욕심을 좇기보다도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줄 수 있을 때, 더욱 진실된 '나'에 가까워진다는 걸. 그런 의미에서 엄마, 그리고 '엄마'라는 이름은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나'로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르겠어. 엄마의 '나'는 엄마 개인을 넘어서 우리 가족의 성취이고 꿈이고 굳건한 믿음인 걸.
엄마, 나는 살면서 믿음이 그렇게 중요한 건지 몰랐어. 나 자신에 대한 믿음, 삶에 대한 믿음. 어떻게 그런 아픔 속에서도 맑은 영혼과 사랑을 지켜 낼 수 있었어? 엄마는 알고 있어? 엄마가 여리면서도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엄마는 엄마의 결핍 그 이상이야. 엄마의 고통이 그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증명해 주었던 것 같기도 해. 그러니까 아팠던 순간들을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해. 잘 견뎌 냈다고, 어쩌면 아직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울다 지쳐 있을 어린 엄마를 충분히 다독여 줘.
엄마가 가족에게 온 힘을 다해 주었던 것들을 충분히 인정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가족 모두 서투르고 각자의 상처가 커서 그런지 표현하지 못한 부분들이 훨씬 더 많아. 이제는 엄마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살피고, 엄마 개인이 원하는 방식대로 가꿀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엄마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어.
꼭 어떤 이유가 필요해서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엄마와 딸의 관계로 맺어진 것은, 엄마에게 이러한 말들을 해 줄 수 있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해 봤어. 다 엄마의 사랑과 아픔, 꿈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말들이야. 내가 이만큼 많이 자라서 기뻐. 그리고 그러한 성장에 가장 많은 역할을 한 건 엄마야.
엄마, 사랑해. 유한한 인생의 남은 시간들은 꼭 엄마의 행복을 위해서 써. 여전히 엄마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
큰 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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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판화. 새가 있는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