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분, 고관절 괴사입니다.

육아 휴직, 남편의 도리

by 라파고

아내는 스물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시속 60km로 달리던 차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아내를 그대로 들이받은 것입니다. 왼쪽 어깨와 허리, 다리가 모두 크게 망가져 말 그대로 몸의 절반 중 성한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8개월 동안이나 병원에서 지내야 했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특히 고관절 골절은 응급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당시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 부위에 후유증으로 괴사가 진행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아내를 만난 것은 회복이 된 뒤였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스물한 살의 여대생이 병실에서 여덟 장의 달력을 넘기며 느꼈을 고통을 생각하면, 마흔이 넘은 지금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연애 초반에는 전혀 낌새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가끔 다리가 아프다고는 했지만, 동네 정형외과에서는 가벼운 관절염이라며 진통소염제를 처방해 주곤 했습니다. 약을 먹으면 또 한동안은 괜찮아졌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통증이 한 번 시작되면 며칠씩 이어지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처음에는 걷는 데 지장이 없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래 걷지 못했고, 나중에는 뛰는 것조차 힘겨워했습니다. 아내는 "괜찮아, 그냥 피곤해서 그래"라고 말하며 언제나처럼 집안일을 하고, 아이 숙제도 봐주고, 장도 보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는 평지를 걸을 때조차 절뚝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피곤 탓이라 생각했지만, 몇 주가 지나도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관절 근처에 근육을 만들면 통증을 완화할 수 있다는 말에 자전거나 필라테스 같은 운동으로 버텨보려 했지만 상황은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어렵게 예약해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MRI를 촬영했고, 결과를 본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관절 괴사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아내의 나이를 확인하시더니 다시 물으셨습니다.


"서른아홉이시죠? 웬만하면 수술은 미루라고 권하지만, 이 정도면 일상생활이 힘드셨을 텐데요."

너무나 측은한 마음에 입조차 떼지 못하는 저와 달리, 아내의 표정은 어쩐지 덤덤했습니다.


"그냥 원래 이 정도는 다 아픈 줄 알았어요."

그 한마디가 가슴을 쳤습니다. 사실 저 역시도 고관절 수술은 예순이나 일흔이 넘은 어르신들이나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참으면 참아질 것 같고, 다음 날이면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기에 아내에게 수술이 필요한 상태인지 먼저 묻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수술이 잘 되면 4박 5일 정도 입원 후 퇴원이 가능하고, 3개월 정도 재활을 거치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머릿속에는 수많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습니다.


병간호는 누가 하지? 간병인을 구하면 잘 돌봐주실까?

내가 출근하면 아홉 살 아이는 누가 돌보지? 석 달만 가사 도우미를 구해볼까?

간병인과 가사 도우미를 석달 쓰면 돈은 얼마쯤 들까?

이 지경에 이르니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회사에 다니는 걸까?


그 질문은 마치 심해 바닥까지 툭 내려앉은 닻처럼 마음 깊숙한 곳에 무겁게 자리 잡았습니다. 이 가장 중요한 질문은 간병인, 가사 도우미 같은 시덥잖은 고민들을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가족보다 일이 우선'인 삶에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요.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내의 큰 수술을 앞두고, 아홉 살 아이가 혼자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저는 돈이 얼마나 들지, 남의 손이 내 가족에게 괜찮을지를 먼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요양병원에 보내고, 아이는 도우미 분께 맡기고, 저는 회사에 있는 풍경을 그려보았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방에 계신 어머니도, 근처의 장모님도 각자의 생업이 있으셔서 저 대신 석 달을 쉬면서 병간호와 육아를 부탁드리기 어려웠습니다. 아내는 오히려 저를 걱정하며 "괜찮아, 조금 쉬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며 저를 다독였습니다. 저는 대체 왜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것일까요.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요즘 수술은 잘 관리하면 평생 재수술 없이 사용할 수 있어요"며 안심시켜 주셨지만, 전신마취 후 비몽사몽 누워 있는 아내를 보니 마음이 좋을 리 없습니다. 마흔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생뼈를 깎아내고 가짜를 넣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수술한 날, 길고 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20cm가량 되는 허벅지의 상처에 진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오늘부터 걸으셔야 합니다"라는 가혹한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싶었지만, 다리가 굳으면 안 되니 힘들어도 걸어야 한다는 말에 아내를 부축해 복도로 나섰습니다. 마치 갓 태어난 기린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것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운 첫걸음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집에서 잘 먹고 걷는 것이 최고의 재활이라고 했습니다. 말은 쉽지만, '집에서'라는 한 단어가 주는 무게를 저는 곧 깨달았습니다. 아내는 되려 제 걱정을 하며 "2주만 더 재활병원에 있으면 어떨까?"라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아내의 말에 인근 병원들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재활 전문 병원들은 대부분 특정 질환의 골라서 받는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모든 재활장비를 다 갖고 있을 수 없어서겠지요. 이상하게도 고관절 치환수술 재활병원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양병원에도 전화를 돌렸습니다.


"고관절 수술 환자 보호자인데, 2주 정도 재활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만, 야간에는 간병인이 없습니다. 대신 기저귀를 착용하셔야 합니다."

"기저귀요? 아직 마흔도 안 됐는데요."

"아내분이 야간에 소변을 자주 보시나요?"

"뭐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병원에 전화를 돌릴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그날 저는 결심했습니다.


차가운 병실 대신 햇볕 잘 드는 거실에서,

낯선 간병인 대신 남편인 내가 직접 아내를 돌보겠노라고.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아내의 재활을 도우며, 아이의 밥과 간식을 챙기고 숙제를 봐주겠노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3개월이 걸리든 3년이 걸리든 상관없었습니다.

그것이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며, 반려자로서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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