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by 유영원


아주 어렸을 적에, 나는 새로 이사 온 동네의 유치원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해 혼자 앉아있었다. 조금이라도 낯설어하는 친구의 표정을 모른 척 하고 함께 놀자는 말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친구가 나를 보고 웃지 않으면 마음 속에 통증이 있었다. 내 시무룩한 표정을 보고 아이들은 나를 더욱 피했다. 보살필 의무가 있는 어른들만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조금 더 커서는 친척들과 함께 괌으로 이민가는 고모 할머니를 배웅하러 공항에 갔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다른 사촌들은 슬퍼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멀뚱히 서 있었다. 다들 섭섭하다는 듯이 껴안고 잘 지내시라는 말만 몇 번을 반복했다. 동생들이 우는 동안 지루했던 나는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할머니가 가시는데 끝까지 배웅해 드려야지. 섭섭해하시잖아?”

“난 섭섭하지 않은데? 내가 할머니랑 같이 산 것도 아니잖아.”


내게 고모 할머니는 느닷없이 나타나 편식을 한다고 타박하는 이상한 노인이었다. 친하지도 않는데 이것저것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듯 듣기 싫은 말을 늘어놓는 그런 존재. 공항에서 집에 돌아와 나는 엄마에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


세상엔 드러내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친구를 사귀고 싶으면 너무 절박해져서는 안 되었고 슬픈 표정을 지어서도 안 되었고 내 마음을 낱낱이 들여다보듯 친구의 부담스러움을 뻔하게 알아봤다고 하더라도 그 알아봄을 말해서는 안 되었다. 고모 할머니가 가더라도 슬프지 않다고 말해도 안 되었고 배웅이 지루하다고 말해도 안 되었으며 동생들의 울음이 너무 낯설다고 느껴도 안 되는 거였다. 날이 갈수록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리스트는 늘어나기만 했으며 놀고 싶단 마음 먹고 싶은 마음 누구를 사랑하거나 혐오하는 마음은 거의 모든 때 숨겨야만 했다. 그건 절제와 윤리의 세계였다.


고모 할머니를 배웅하던 날, 나는 동생들의 눈물을 보며 어쩌면 저 눈물은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분의 죽음 이후에도, 그 분이 죽었다는 사실 조차 가끔씩 잊는 자신에게 놀라곤 했다.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그 무감함을 숨겨야 한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게 된 것이다.


<슬픔이여 안녕>의 세실은 엄청나게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애다. 보트를 타는 또래 남자아이에 대한 사랑에 몸을 던지는 건 물론이고 다른 이의 감정도 예민하게 알아볼 능력이 있다. 아버지가 안에 대해 느끼는 사랑을 한 눈에 파악하고 그 상황을 좌우할 능력이 있을 만큼. 세실의 가장 큰 재능은 타인에 대한 공감 없이, 공감해야 한다는 개념도 없이, 그저 순간의 감정에 무한히 진실하다는 점이다. 그 진실함으로, 세실은 아버지와 안을 놀라우리만큼 잔인하고 교묘하게 갈라놓는다.


다른 이유는 없다. 안이 아버지와 세실의 방탕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통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세실과 아버지, 방탕을 공유하는 부녀는 정말로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이다. 그들은 절제 없는 관능을 추구하는 타고난 유혹자들이며, 그 유혹에 책임지는 법은 배우지 못했기에 더욱 더 관능적이다. 충격적인 사건과 함께 세실의 계략은 성공하지만, 결말 이후에도 그들이 그 관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10대 시절 아버지는 엄마와 나와 떨어져 해외에서 몇 년을 보냈다. 그 때에 해외에 나가는 일은 지금처럼 평범하지는 않았다. 나는 아빠는 어디있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아주 멀리 계시다고 말하곤 했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부재에 슬펐다기보다 해외에 멀리 떨어져있는, 베일에 쌓인 듯한 아버지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다른 평범한 가족들과는 다른 우리 가족만의 작고 아름다운 슬픔을 과장하고 싶었다. 돌아보면 그것은 고통은 아니었다. 도리어 응당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요구를 내 안에서 무언가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한 것에 가까웠다. 진짜 고통과 슬픔은 아버지가 돌아온 후에, 나의 성장과 함께 쌓여갔다.


나의 사춘기는 느껴야 하는 고통과 진짜 고통을 구분하기에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감정을 재주껏 연기하는 법을 익히며 나는 성인이 되었고 재능이 만개함에 따라 스스로를 속이는 기술도 무르익었다. 강렬한 애착과 순간의 갈망, 한 순간 조여오는 외로움을 무시하는 법을. 그로서 인생의 진짜 고난을 타고 넘는 법을.


언젠가는 시간이 지나는 것 자체가 비극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가 왜 자라서 돈을 벌고 험한 꼴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오래 생각하던 날도 있었다.


<슬픔이여 안녕>의 안녕은 작별인사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낯선 세계에게 건내는 첫 인사에 가깝다고 한다. 유치원에서 울던 모습, 공항에서 슬프지 않아 무감하게 서 있던 모습. 그건 내 머릿속에 한 순간의 스냅샷처럼 남아있다. 오래 시간이 지나도 처음처럼 선명하다. 깎아져야만 하는, 무디고 바래져야만 하는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듯이.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이 왈츠를 추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