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가 일로 바쁘게만 살던 여동생을 변화시켰어요. 식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동생이 얼마 전부터 식물 기르는 재미에 푹 빠져있더라고요. "
언니는 왜, 어디서 위와 같은 말을 하게 되었을까?
언니가 관심 분야의 강의를 들으러 갔단다. 참석자 모두 '코로나로 인해 달라진 것들'이란 주제로 한 마디씩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나. 그래서 내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다. 평소 나는 집에서 무언가를 기르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1 가구 1 반려동물이라고 할 정도로 반려동물을 기르는 집이 많아졌지만, 나는 동물을 집안에서 기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첫 번째 이유는 그렇게 정성을 들여 기를 자신이 없어서이다.
그렇다면 식물 기르기는 괜찮은가? 물론 애완견보다는 손이 덜 가겠지만 , 식물도 기르려고 사 본 일은 거의 없다. 종종 선물 받은 식물조차도 받는 족족 모두 시들어 죽게 만드는 이른바 ‘똥 손’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물이나 식물을 기르는 것에는 무관심, 무재능인 내게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반려식물을 기르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된 거다.
시작은 '녹보수'라는 나무를 맞이한 때부터이다.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는 답답함,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창일 때다. 바쁜 생활이 일시정지 되고, 주말에도 스케줄이 비는 여유가 생겼다. 어느 날 평소에 잘 다니지 않던 아파트 장터를 어슬렁 구경 다니다 이동식 화원 앞에 멈춰 섰다. 오후 햇살을 받아 유난히 잎사귀를 반짝이는 나무 한그루를 발견한 거다.
'아저씨 이 나무 이름이 뭐예요?"
"녹보수예요."
이름까지 맘에 들어 그날로 집에 들였다. 윤기 가득 빛나는 초록색 잎사귀를 흔들며, 출퇴근하는 나를 반기는 모습에 가족이 집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앤 그린'이라 이름 붙여 주었는데 조금씩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어 가끔씩 화원에 들렀다. 화원에 가는 길은 살레임으로 가득했다.
제일 먼저 생긴 친구는 '스킨답서스'다. 누구나 잘 기를 수 있는 화초답게 집안 어디서든 잘 자랐다. 왕성하게 뻗어내리는 가지를 위로 자라도록 했더니, 방안 한 벽면을 담쟁이덩굴처럼 뒤덮었다. 방안에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두 번째 친구는 '스노우사파이어'다. 영화 '레옹'에서 마틸다가 들고 다니던 화분 속 식물이다. 이름답게 초록잎에 눈송이가 하얗게 내려앉은 것처럼 낭만적 자태를 뽐낸다.
키가 커서 멋스러운 '홍콩야자'는 한 줄기에 엄지손가락만 한 잎이 꽃무늬 모양으로 여러 개가 핀다. 초록색 잎 가장자리가 노란색으로 물든 모습이 매력적이다.
이렇게 하나 둘 집에 데려온 친구들이 제법 숫자를 이루다 보니 집이 점점 화원이 되어가는 듯하다. 집에 놀러 온 언니가 이걸 보고 깜짝 놀랄 만도 하다. 코로나가 나에게 ‘똥 손’을 탈피할 기회를 준 셈이다.
나의 하루는 “얘들아 안녕”하는 아침 인사로 시작되고, “잘 자”라는 저녁 인사로 마무리된다.
애정 가득 담은 인사를 건네다 보면 도리어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식물과의 교류는 인간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시심을 불러일으키며 그 심성을 풍부하게 합니다.
라는 말처럼 식물과의 교류는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진정시키고 마음을 크게 정화시켜 준다.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우주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우주비행사가 식량을 자급자족하기 위해 우주정거장에서 밀이나 채소를 재배하기도 한다는데, 이러한 재배가 우주비행사의 정신 안정에 매우 도움이 된다고 하니 말이다. 한 우주 비행사는 우주에서 식물을 기르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작은 뜰에서 귀여운 식물을 돌보고 있으면 매우 즐겁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인간에게는 아마도 무언가를 돌보는 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일마저 없으면 '공허감'을 느낍니다.
식물을 길러보니 깊이 공감되는 말이다. 조그만 새싹이 자라서 가지를 늘리고, 꽃망울이 터지는 모습을 보면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즐거움이 나를 위로하고 생기발랄하게 치유해 준다.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마법 같은 변화이다. 코로나로 인해 반려 식물을 키우는 인구가 급증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