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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연대 Sep 09. 2020

시민력은 투쟁이다

[시민력을 찾아서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변재원을 만나다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꾸어 갑니다. 국가와 자본에 동원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변화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힘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시민들은 언제나 자기 삶의 가치를 표현하고 소통하며, 사회적 감각을 진화시키고 갈등을 해결할 잠재적인 능력을 키워왔습니다. 시민자치문화센터는 <시민력을 찾아서> 프로젝트를 통해서 시민력을 위해 활동하고 협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변재원 정책국장


<시민력을 찾아서> 여섯 번째 인터뷰이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변재원 정책국장을 만났다. 전장연은 차별과 배제 없는 장애해방의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2007년 출범한 단체로, 장애인 이동권 쟁취와 차별금지법 재정 등 전방위적인 투쟁을 펼쳐왔을 뿐만 아니라 탈시설∙자립생활 등 패러다임 전환에 앞장서왔다.

한국 사회 어떤 시민단체보다 뜨겁고 강렬한 운동 현장을 일구어오는 이들 활동가는 자신들의 터를 장판(장애인운동판)이라 부른다. 장판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시민력과 협치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변재원 활동가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예술학교에서 장판까지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라는 장애인 단체에서 정책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변재원이다. 전장연은 목에 쇠사슬을 건다거나 밧줄을 묶고 나타나서, 언론 속보에서 ‘장애인들이 죽으려고 나타났다'라고 많이 소개된 단체다(웃음). 우리 사회의 진보적인 조직 중 가장 강한 전투력과 활동력을 가진 단체라 할 수 있다.


부양의무자기준 완전폐지를 위해, 목에 사다리를 걸고 나선 전장연 활동가



활동가가 되기 전에, 예술경영과 행정학을 전공했고 IT 기업에도 재직했다고 들었다. 비교적 이색적인 경력인데, 어떤 계기로 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는지 궁금하다.

예술학교에서 콘서트나 전시 등을 기획하는 일을 하다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취업했다. 컴퓨터 앞에서 통계 돌리는 일이 주였는데, 재직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가뜩이나 장애인이었는데 사고 후유증이 심해서 업무를 하기에 몸이 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행정학을 선택했다. 예술학교에서 경영을 공부하며 늘 행정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는데, 예술가가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사적 시장에서 경영을 통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후 IT기업에서 마케팅 인턴으로 일하다가,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장연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코로나19였다. 많은 장애인들이 코로나19로 죽었는데, 이 시국에 한해서 무언가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이후 유학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왔는데, WTO 사무총장이 엊그저께 우리 세대에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웃음).

아무튼 이 모든 시기 동안 일관된 하나는 있다. 내 몸이 장애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살았다는 거다. 한 사람의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 정체성을 받아들이기까지 여러 경로를 거치다가, 장애인으로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전장연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

전장연을 되게 싫어하던 시민 중 하나였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까지 할까? 왜 미운 짓만 골라서 할까? 쇠사슬을 목에 감는다거나, 그것도 모자라 사다리를 목에 걸기도 하며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출근 시간 지하철을 습격해서 달리는 철로를 막아서며 시민들의 출근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 모든 행동들이 비장애인 중심사회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 않나.

하지만 활동을 시작하고, 장애인 당사자가 느끼는 삶이 그만큼 절박하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과거에 장애인이라고 하면 부정적이고 나태하고 게으르고, 아프고, 나약하다는 생각이 장애인 당사자인 나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교육받은 시선이고, 내가 비장애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주입했던 시선이란 걸 깨닫고 있다. 28년 동안 장애인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활동을 시작하고서야 몸과 마음이 조응하고 있다.






투쟁에서 거버넌스까지

다른 분야의 사회운동과 비교해서 장애인 운동판이 더 강력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지니게 된 비결은 무엇인가?

먼저 장애인 운동은 투쟁 대상이 명확하다. 바로 국가다. 장애인 문제는 국가가 아니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까, 싸움의 주체가 굉장히 명확하고 이해관계도 최소화되어있기 때문에 눈치 보지 않고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다른 사회운동의 경우 투쟁의 대상이 회사라거나, 문화예술계의 경우 특정 인물이 될 수도 있다.

한편, 현장에서의 조직력이 강한 이유는 두 가지다. 아스팔트에 나올 수 있는 시간이 많고, 잃을 게 없다는 점이다. ‘투쟁하러 나오는 걸 사장님이 싫어하면 어쩌지’라고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노동자의 조직력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

장애인 당사자로서 말씀드리자면, 국가로부터 보장되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절박할 수밖에 없다. 장애인 관련 예산은 점진적으로 증액되기보다 확 늘어나야 하는 게 많다. 장애인 정책 대다수 문제는 장애인 생존권과 직결된 게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동권 투쟁의 경우, 지하철 타기 힘들다는 문제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지하철 역사에서 리프트를 타다가 죽은 사람이 많아서 시작한 투쟁이다. 그만큼 절박하기에, 현장 투쟁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전장연이 밖에선 반사회적인 단체로 비칠 수 있지만, 어느 단체보다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개선하는 데에도 힘쓰고 있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기엔 시민사회의 투쟁이 반정부적이고 반사회적일 수 있다. 애국보수의 말로 하자면 ‘국가 발전에 저해가 된다'고나 할까(웃음). 하지만 전장연 활동을 하며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느꼈다.

행정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부처는 예산을 확대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스스로 예산을 확대하겠다고 얘기하면 민주적 정당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게 거버넌스라고들 얘기하는 시민의 목소리다.

장애인이 어떤 정책이 필요하다고 계속해 얘기하면, 보건복지부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고 기획재정부를 설득하게 된다. 기획재정부는 기본적으로 증액이 아니라 삭감이 목표인 부처다. 정부에선 효율적인 집행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예산 감축의 경향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도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중요하다.

바깥에서 보면 전장연이 왜 보건복지부만 때리냐고 하지만, 안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겉으로는 싫은 척할 순 있어도 보건복지부 입장에서 보자면, 시민단체의 투쟁으로 인해 담당 공무원이 더 생기고 예산이 느는 등 경쟁력이 더 강해지는 셈이다.

한편, 정부 공무원이 차마 자신의 업무 영역의 한계로 인해 상상해낼 수 없는 제도를 만들어내고 이를 실현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전장연은 정부와 소통을 정말 잘하고 있는 단체라 생각한다. 협치란 세련된 홀에서 칵테일을 마시면서 하는 우아한 게 아니라, 길거리에서 협상 단계부터 시작해서 공생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간담회 등 제도 내에서 목소리를 내는 방법도 있을 텐데, 투쟁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지자체에서 시민모니터링단, 시민정책위원회 등을 많이 운영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가 원자화되어있다. 정부 입장에서도 이를 반영해 급증적인 예산을 편성하긴 어려울 것이다.

투쟁에는 조직화가 동반되며, 모두 함께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갖고 하나의 채널로 내보내기에 응집력이 있다. 






시설에서 지역사회까지

한편, 전장연에서는 국가와의 투쟁만큼이나 야학 등 일상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에서의 활동도 일구어가고 있다.

맞다. 전장연 활동에 있어 우선순위 중 하나는 탈시설 운동이다. 부랑자, 장애인 등 생산성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을 국가가 시설이라는 곳에 가둬놓고 집단적으로 생활하게 했다. 국가가 외딴곳에 고립시켜놓은 셈이다. 이 시설로부터 나오게 하는 것까지가 투쟁의 영역이라면, 나오고 나서 지역 사회에서 통합되는 건 문화의 영역이다. 이 영역을 만들어가기 위해 여기 유리빌딩에서도 사단법인 노란들판, 노들 장애인야학 등 다양한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제도권 교육이 아니라, 자기결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예술을 통해 발언권을 확장시키는 교육이 중요하다.

사단법인 노들센터를 토대로 들카페에서 장애인 고용문화를 만들어갈 뿐만 아니라, 탈시설했지만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아 혼자 살아가야 하는 장애인들이 이 공간에 모여 하나의 문화를 만들고 있다. 커뮤니티보다는 조금 더 진보된 지점이 많다. 지역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원자화되어 뿔뿔이 흩어진 경우가 많지만, 유리빌딩에서 함께 모여 밥 먹고 공부하고 차를 마신다. 취업을 희망하는 장애인들이 여기서 교육받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사업을 하며, 투쟁의 영역과 별개로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시설에서 나온 후 바로 독립할 수 없는 경우, 장애인 그룹홈(공동생활가정)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언뜻 보면 시설도 장애인이 한 곳에 모여있는 곳이고, 그룹홈도 장애인이 한 곳에 모여있는 곳이지 않나.

중요한 질문이다. 전장연은 그룹홈을 두고 시설의 소규모화라고 부른다. 올드보이처럼 갇혀 살다가, 시설에서 나오는 이유는 보통 거의 비슷하다. 운영재단에 비리가 있거나, 폭력 사건이 있어서다.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시설에서 나와도 그룹홈에 가면 6명이서 모여 살게 된다. 일각에선 점증적으로 바라보며 이 과정을 거쳐야 나중에 1인 1실이 가능하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1인 1실을 배정하는 게 시설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말한다. 시설 종사자분들은 시설의 소규모화를 적극 지지하는데, 예산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장애인들이 자기 명의의 분양이든 전세든 집이 있어야 하고, 적어도 1인 1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설 바깥에 자기 명의의 집을 갖는 것만으로 지역사회에 뿌리내리긴 힘들 것이다. 다른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탈시설한 장애인이 직면하게 될 문제를 사안 별로 얘기하자면 파편적이니, 권리로 묶어 얘기하겠다. 먼저 건강권이다. 탈시설한 장애인들이 건강이 안 좋은 경우가 많기에, 의료보험이 적용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한편, 호적상 가족이 있어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있어 별도의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지자체와 협의하기도 한다. 교육권도 중요하다. 대학교를 가자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장애인야학은 평생교육법에 모호하게 등록이 되어있어, 국가로부터 지원이 약하다. 예를 들어,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공립학교엔 방역을 꼼꼼히 해줬는데 장애인평생시설에는 무척 낮은 수준의 방역을 해줬다.

그리고 노동권 문제도 있다. 작년, 중증장애인 맞춤형 일자리를 서울시와 협의해서 12억 예산을 마련해 40만원 내외로 지급하게 되었다. 동료지원가라는 업무 등 공무원이 상상하기 힘든 장애인 노동권 관련 사업을 끊임없이 제시하여 소득을 보장할 수 있게 노력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탈시설 후 지역사회에 통합되는 데에 얼마나 많은 권리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지에 대한 얘기다. 이동권, 노동권, 건강권, 교육권 등 포괄적인 권리 증진과 지역사회 통합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에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비장애인이 공기처럼 누려왔던 권리들을 장애인은 누리지 못하고 있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한편, 장애인 운동은 노동권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 것 같다.

활동가 혹은 활동가를 꿈꾸시는 분들이 장애인 운동에 관심을 더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장애인 운동은 인간의 조건에 관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씀드린 이동권, 노동권, 주거권, 건강권 등은 근대사회에서 정의하는 시민의 권리들인데, 장애인에겐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투쟁은 근본적으로 시민의 조건이자 인간의 조건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다. 장애인 운동을 통해 베이스라인이 확장되고 나면, 모든 사람들의 권리가 증진된다.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다. 변재원에게 시민력이란 무엇인가?

시민력은 투쟁이다. 오늘날 투쟁을 기피하는 사회가 되었다. 투쟁 같은 구닥다리 말이 아니라, 협력이나 공생, 특히 협치란 말이 각광받고 있다. 다들 모금사이트에서 예쁜 물건을 파는 게 좋겠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투쟁이란 보다 평등한 관계에서의 협치를 위한 선결조건이다. 자기 목소리에 영향력이 없다면 협치란 동원일 뿐이지 않나. 그래서 투쟁이 시민력의 근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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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9. 박이현∙이두찬. 시민자치문화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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