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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연대 Feb 23. 2021

안녕. 할아버지

백기완 선생님의 장례를 준비하며


사진 참세상

백기완 2021년 2월 15일 새벽 4시 45분 영면(향년 89세, 1933년생)

안녕...... 할아버지.....     


무거운 마음으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울컥거리는 마음을 눌러 담고 절을 올렸다. “유아 왔니” 웃고 계셨다. 한 손을 치켜들고는 “똑바로 살라우!” 호통치고 계셨다. “참 좋다” 라며 응원해 주고 계셨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나를 조용히 불러 앉으라고 하셨다. 너무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시며 “서덜(불씨)이 돼야 해! 어둠을 밝히는 서덜!” 인정해 주고 믿어주고 격려해주셨다. 또 어느 날은 학림다방에서 신문을 보다가 신문 한 귀퉁이 활동을 알리는 기사가 나온 것을 보시고는 “눈물겹도록 좋다. 우리 유아 참 착하다”고도해주셨다.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 나는 착한 계집아이였다.   



“할아버지 세배받으세요.” 고개를 들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조용히 상주님께 눈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나와 같은 마음이 하나둘 모였다. 선생님 가시는 길에 모래알 한 줌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 모이고 있었다. 정신 차리고 눈 똑바로 뜨고 한발 떼 기를 시작했다. 장례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이름을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으로 정했다. 기자간담회를 하고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나누어 맡았다.    

  

매일 저녁 장례식장 앞에서 추모문화제를 진행하기로 했다. 첫 문화제는 문화예술인들이 한 판 신나게 열어보자고 이야기가 되었고 선생님이 좋아하실 거라 생각하고 슬프지 않게 꾸려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가루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순간순간 울컥거려 말로는 힘차게라고 외쳤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가루눈을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는 이런 눈이 내리는 날은 무지랭이들이 양심수를 구출하러 가는 날이라고 하셨다. 슬픔에 빠져있지 말고 어서 어여 한 발 떼기를 준비하라고 호통 치시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사진 정택용

둘째 날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돌며 거리행진을 했고 그 끝에 장례식장으로 모여 추모문화제를 진행했다. 통일문제연구소 채원희 활동가의 호상 인사는 눈물범벅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응원의 발언으로 들렸다. 장례 전날 추모문화제에서는 가수 전인권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컬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불렀고, 그 옆에는 다음날 영결식 노제에 함께 할 부활도, 영정, 꽃상여를 만들고 있었다.    


영결식 날이 밝아오고 새벽부터 분주하다. 행진 대열을 맞추고 서서히 거리로 나가는 사람들. 운구차가 자리를 잡자 노제 행렬은 시작됐다. 풍물이 앞잡이를 하고 그 뒤로 방송차가 자리를 잡았다. 통일문제연구소 앞 소나무 길에 행렬은 멈춰 섰고 유가족은 영정과 함께 선생님이 오랜 시간 자리하셨던 통일문제연구소와 매일 아침 차 한 잔을 마시며 신문을 읽으시던 학림다방을 돌아 다시 소나무 길로 나왔다. 추모사를 준비한 인사들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마지막 가시는 길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뒤로하고 영결식이 있는 시청광장으로 향했다.  

    

오전 11시 서울광장 영결식은 문정현 신부님의 추도사로 시작됐다. “선생님. 백기완 선생님.”을 여러 번 외치는 신부님의 목소리는 존경과 설움과 한이 느껴졌다. “항상 옆자리를 내어주시던 선생님이 안 계시니 이제 저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울부짖는 목소리는 떨렸다.   


사진 채원희

   

영결식 전날, 백기완 선생님의 부인 김정숙 선생님은 편지를 쓰셨다. 함께 부르던 노래를 이제는 부를 수 없게 되었다며 그곳에서 나를 기다려 달라고, 우리 만나는 날 함께 노래를 부르자는 내용의 편지였다. 함께 부르던 노래의 1절은 백기완 선생님이 부르시고 2절은 김정숙 선생님이 부르셨다고 한다. 1절 가사를 기억할 수 없으니 이제 더 이상 부르지 못한다는 내용에 유가족들은 오열했다. 거동이 불편한 김정숙 선생님은 먼발치로 시선을 두고는 혼잣말처럼 계속 “불쌍해... 불쌍해”라고 중얼거리셨다.     



하관식 준비를 위해 먼저 마석 추모공원으로 달려갔다. 두 해전 컨베이어 벨트에 낀 채로 목숨을 잃은 청년 김용균의 묘에는 백기완 선생님이 묘비 글을 써 주셨다. ‘넌 어디서건 눈을 부라려 해방의 역사를 빚고 있구나. 용균아 사랑하는 용균아...’ 젊은 청년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강하게 이야기해 주신 글귀였다. 이제 그 옆에 선생님의 자리가 있었다. 깊게 파인 자리 뒤로 큰 걸개그림 속 선생님은 모두에게 호통치고 계셨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입관식이 있던 날 할아버지는 하얀 버선을 신고 계셨다. 

차가운 발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쥐고 한없이 울었다.     

 

선생님이 자주 들려주신 ‘버선발 이야기’를 다시금 새겨본다. 

“버선발이 엄마를 만나던 날,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 있겠다던 엄마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엄마는 깡마른 몸에 썩은 밥풀을 입에 물고 쩍쩍 갈라진 손엔 호미를 치켜들고 '네 이놈, 내 땀을 내놓거라, 이놈. 내 피눈물도 내놓고 내 바랄(꿈)도 내놓고 네놈의 그 응큼한 대갈빼기도 내놓거라, 이놈' 하며 젖은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멈추지 않던 바로 그곳에서 버선발은 다시 세상 속으로 달려 나갑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안녕. 할아버지


사진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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