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전태일 열사의 유가족들은 50년 간 소중히 보관해왔던 전태일 열사의 친필 일기를 세상에 공유하기로 했다. 전태일 일기장은 모두 7권으로 1967년 2월경부터 1970년 3월까지 작성된 글로 170쪽 분량이다. 어린 시절 회상 수기, 편지글, 소설 습작, 자기 생활 체크의 질문들, 고민하는 낙서, 결단의 글들로 구성되어있다.
일기장 복사본을 받아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 한 자 읽기 시작했다. 타인의 글씨를 해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글씨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글자들은 글의 문맥을 유추하며 읽어야했다. 일기장를 넘기다 보면 의미 없는 끄적거림이 있는데 영어 알파벳을 반복적으로 적기도 했고 등대, 새, 비행기, 배 같은 그림과 옷을 만들 때 사용하는 재단용 패턴 그림이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직업과 욕망이 그려진 것이라 짐작해본다.
10대 소년의 삶은 어느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 그대로였다. 술과 폭력으로 가족에게 화풀이하는 가부장적 아버지와 자식들을 위해 희생적인 어머니 그리고 순종하는 어린 아이들과 반항하는 아들. 그 아들 전태일의 일기는 여느 평범한 소년의 성장기였다. 동생들을 챙기는 장남의 무게감과 그 속에서 생긴 어린 동생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은 20대로 넘어가면서 봉재공장 여공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일기장을 모두 읽고 난 후 무언지 모를 아쉬움과 허전함이 느껴졌다. 엄청난 기대감으로 시작했던 첫 느낌 그리고 아쉬운 마무리. 아마도 나는 영웅처럼 묘사되는 영웅 서사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는. 전태일은 내 주변에 나와 공존하는 모든 노동자였을 뿐이다.
전태일과 관련된 다양한 글들을 찾아 읽었다. 누군가 일기장을 찢어 가져가 버린 1970년 8월 9일 일기 속 적어놓은 결단서 “나는 돌아가야 한다”를 읽었다. 누가 왜 가져간 것일까. 누군가 소장하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결단서가 담긴 일기장은 훼손 이전에 기자들에 의해 촬영되어 알려졌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중략)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궁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1970.8.9.)
일기장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떤 식으로 사회에 그 의미를 알려야하나. 고민을 하던 중이었고 전태일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기분에 그가 되어 일기를 읽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이소선 어머니가 있고 전태일 그가 있는 곳에서 일기를 읽고 싶어졌다. 마석 모란공원. 하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고 다른 공간을 고민했다. 평화시장, 창신동 봉제공장 거리. 창신동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보고 아름아름 공장을 빌려보려고 했지만 부담스럽다는 답변과 사라져버린 공간들, 그리고 너무 현대식으로 만들어진 봉재박물관 등 머릿속에 그려본 그림과는 달랐다. 고민하던 중 문화연대 활동가의 추천으로 청계천변 평화시장 맞은편 신발상가 옥상 DRP 공간을 소개받았다. 답사를 갔고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멀리 전태일 동상이 보이는 이 공간이 그의 일기를 읽기에 너무 좋겠다는 확신이 섰다.
누가 일기장의 글을 읽으면 좋을까. 김혜진과 고민을 함께 나누었다.
전태일 열사의 유가족 전태삼 (전태일 열사의 동생)
청년노동자 윤서(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활동가)
80년대 구로동맹 파업에서 현재의 비정규직 투쟁을 하고 있는 김준희(대우어패럴 교선부장으로 85년 구로동맹파업에 동참했고, 지금은 한화생명보험 노조 지회장)
법률가 서채완(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
문화예술가 은유(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기록하는 문필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남기웅(구미의 아사히글라스라는 업체의 사내하청 노동자)
공간을 정하고 함께 글을 읽어 줄 분들도 정했다. 이제 7권의 내용 안에서 낭송 글을 정리해야 한다. 인권활동가 훈창에게 부탁을 했다. 훈창은 SNS에 낭독회 준비과정에 대한 글을 남겼다.
“일기장 전체를 읽으며 이 사람의 삶에 차있는 경험과 생각, 그리고 익히 알고 있는 그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6명의 낭독자가 결정되었고 낭독자와의 연결도 고민해야 했다. 낭독자가 일기와 너무 무관하면 안될거 같았다. 다행히 구글에 검색하면 나오는 분들인지라 그들의 인터뷰나 글을 찾아서 읽었다.
일기장은 시간순서로 되어 있지 않고 회상도 많기 때문에 반복해서 읽어 머릿속에 시간의 순서로 스토리텔링을 했다. 일기장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부터 그의 마지막 까지를 액자로 만들어보고 각 액자들의 공통점을 찾으며 5가지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이렇게 몇 번의 이야기를 만들다 그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된 과정, 서울에서의 삶, 사랑과 다짐, 노동자의 삶, 그가 꾸었던 꿈으로 나누며 낭독자와의 연결을 생각했다. 도입은 그가 아마도 이런 꿈을 꾸며 정말 즐거웠겠다고 생각한 이야기를 넣었다. 그리고 덜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다 덜어내진 못했다. 미련이 남는 부분은 남는 부분으로 남겼다.”
이렇게 준비된 낭송회는 2021년 5월 1일 노동절 비오는 저녁 하루 종일 투쟁으로 거리를 뛰어 다니고 의지를 다졌던 동지들의 쉼의 시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시간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청계천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낭송회 사회를 본 정경원이 소개한 내용은 전태일의 짧은 생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 준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봉제공장 노동자, 어머니는 광주리 행상. 전태일의 가족은 가난을 피해 서울로 올라왔다. 태일은 지게꾼들을 상대로 팥죽, 찹쌀떡, 비빔밥을 팔거나 채소 행상을 해 입에 풀칠하던 어머니가 병이 들자 남대문국민학교를 그만두고 신문팔이를 한다. 빈병을 사다 닦아 청량리시장에 팔고, 구두닦이, 꽁초줍기, 하드장사, 우산장사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다.
대구로 내려온 전태일은 15세에 청옥고등공민학교 입학. “내 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
전태일은 1964년 봄 16살의 나이에 평화시장 노동자가 되었다. 병들어가는 어린 여공을 보며 억울함과 연민을 느껴 풀빵을 사주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에 재단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몸이 아픈 어린 여공들이 재단사 전태일에게 고통을 호소했지만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각혈하고 쓰러진 여공이 태일에게 준 충격은 컸다. 잔인한 노동조건을 바꾸자. 1969년 전태일은 ‘바보회’를 조직했다. 노동법을 공부하고 근로조건을 조사해 노동청에 청원서를 냈다. 답변은 경멸과 비웃음뿐이었다. 청원 좌절 후 그는 착한 자본가를 구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답은 아니었다.
유가족이 보관해온 일기장 내용은 여기까지다.
전태일은 1970년 4월말 경 삼각산에 들어가 수도원을 짓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다. 그리고 8월 9일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위에 언급한 “나는 돌아가야 한다”가 그것이다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태일은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바꾸고 본격적인 노동운동조직으로 정비했다. 그리고 투쟁을 계획했다.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성서>를 만들어 삼동회원과 90여 명의 노동자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제출했고 이 진정서가 경향신문에 보도되었다. 하지만 근로조건은 달라지지 않았다. 10월 20일(노동청 국정감사 예정일) 노동청 정문 앞 집회를 계획했으나 이를 안 근로감독관이 태일을 찾아와 애원해 집회를 보류했다. 그러나 근로감독관은 국감이 끝나자 말을 바꿨다.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길에서 집회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경찰의 방해로 실패했다. 대신 11월 7일까지 해결해주겠다고 정부가 약속했지만 그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청계천 노동자들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화형하기로 했던 11월 13일.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당겼다.
전태일 일기장낭독회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