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힘들었다는 너에게>를 읽으며 돌아보는 '나'
쓰지만 좋은 약이었다.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나는 100점'이라고 김칫국을 사발로 마시며 살았을 테니까.
"언니가 그만둔다고 하니까 솔직히 해방감이 느껴졌어요" 그녀의 말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마음을 서늘하게 베었다. (중략) 당시 내 딴에는 많이 배려하는 좋은 상사라고 자부했는데, 그 '내 딴에는'이라는 말이 얼마나 일방적 배려의 생색인지, 그 시절의 나는 몰랐다.
"부장님 하고 출연자 하고 아직까지 수다 중이야.
왜 저러신다니 매번. 짜증나. 빨리 가야 하는데 정말 너무하네."
그런데 그 순간, 보낸 카톡 메시지 앞에 숫자 '2'가 눈에 들어왔다. 후배와의 카톡이므로 분명 '1'이어야 하는데.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가장 힘든 건 '심기 관리'였다. 나는 사장님에게 한 소리 듣거나 회의에서 깨지고 오면 '나 지금 화났어'라는 분위기를 뿜어냈다. 다른 직원들이 속으로 '왜 저래?' 하고 넘길 때 그녀는 나와 친하다는 이유로 그럴 수 없었다. 결국 내 심기 관리의 부담까지 지면서 감정 노동을 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2,30대 때에는 비슷한 모습이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우울하거나 화가 나면 '나한테 말 걸지 마', '나 건들지 마'하는 기운을 온몸으로 드러내곤 했다. 내 감정과 기분에 빠져서 나의 감정 받이를 해야 하는 다른 사람이 어떤 기분일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돌아보면 그때는 후배도, 나도 서툴렀다. 내 입장에서는 워킹맘인 그녀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내가 얼마나 그녀의 일을 떠맡고, 또 그녀의 승진을 위해 얼마나 사장님께 어필했는지 (그녀는) 알 턱이 없었다. 후배 입장에서도 내가 알아채지 못하거나 차마 말하지 못한, 억울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1년 뒤, 나는 어학연수에서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생각해보면, 그의 진심을 믿으면서도 나는 늘 도망갈 준비를 했다. 매일 당하는 구박 루틴에 무뎌지지 못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 표현에 솔직하지 못했다. (중략)
어쩌면 나는 관계가 불편해지거나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솔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중략) 한 번은 그 PD가 나에게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한 적이 있다. 그 표현이 너무 굴욕적이었던 데다가 그동안 당한 게 쌓여 그 한마디에 폭발해버렸다.
PD는 움찔하더니 그날 처음으로 나에게 사과를 했다.
"그래. 나는 남들보다 반걸음 빠른 사람이고, 너는 반걸음 느린 사람인데 이런 우리가 만났으니 서로 힘들지."
나는 그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되고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피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걸 보여 주었다기엔 너무 감정적이어서 밤새 "아놔"하면서 이불킥을 했다.
(하루아침에 방송 프로그램 폐지를 통보받은) 김숙의 이야기를 들은 송은이는 너무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가 잘리지 않는 방송을 만들자." 그게 바로 팟캐스트 <비밀보장>이었다.
"방송연예대상을 보다가 너 생각이 났어. 울 소영이 내년엔 상 받는 거 봤으면 좋겠네. 그런 소원 하나 빌어봅니다."... 나조차 더 이상 꾸지 않는 꿈. 그래서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민망스러운 일을 꿈꾸다니.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판타지 같은 격려에 순간 멍해지더니 원인 모를 눈물이 났다.
"섭외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다 알잖아요. 아는 처지끼리 도와야죠."
이심전심. 그분은 똥줄 타는 그 마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성실하게 답변하고, 약속한 바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보이는 사람. 그리고 제작진이 미안할 정도로 성심껏 준비해주는 사람은 두고두고 고맙고, 그 마음이 오래간다.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태도다. 아니, 태도도 실력이다. 정말 많은 말을 한다. 그 사람의 글보다, 말보다 훨씬 더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그에 대한 인상을 만든다.
생각해보면 그때 아빠는 몹시 서툴렀다. 그리고 아빠의 서투름을 이해하기엔 난 너무 어렸다.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 아빠도 서툴다.
... '나는 왜 덕선이처럼 아빠한테 내 마음과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화라도 내볼걸.' 만약 그랬다면, 아빠도 덕선이 아빠처럼 "미안해. 우리 딸이 좀 봐줘"라고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나도 당연히 봐드리지 않았을까. 아빠도 잘 몰랐던 것뿐이라는 걸, 어른도 서툴러서 실수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일들을 하거나 낯선 세계에 발을 디딜 때, 우리의 생각은 환기가 된다. 빡빡하게 조여진 마음이 풀어진다.
내 시야를 덮고 있던 것들이 걷히면 내가 머물던 세계 너머를 보는 시야를 갖게 된다. 내 삶의 지경이 넓어지는 건 당연하다.
그럴 때마다 무기징역수의 표정도 한 꺼풀씩 벗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