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시민의 연대와 결의로 올려 치는 체제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 - 맹자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의 밤하늘은 유난히 혼란스러웠고 시끄러웠다. 윤석열은 긴급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는 종북 세력을 척결하겠다고 선언하며,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겠다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겁박하며 스스로 군사를 일으켰다.
헌법이 요구하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계엄령은, 억압의 어둠을 더욱더 두껍게 할 뿐이었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빌린, 무디고도 비천한 조치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 자체를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위협했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빛이라고 불리던 것들이 어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지 목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의회는, 침묵하지 않았다. 12월 4일 새벽 1시, 국회의원 190명이 모여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한밤중에도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국회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 순간은 폭풍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나무의 단단한 뿌리와도 같았다. 국회는 국민의 대의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했으며, 흔들리는 민주주의의 배를 다시금 정박지로 이끌어가려는 결연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이 결의는 단순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져가는 세계 속에서 던진 희망의 작은 돌멩이였다. 그러나 그 돌멩이는 홀로 던져진 것이 아니었다. 여의도 국회 주변으로 모여든 시민들은 군대와 경찰의 장벽 앞에서 주춤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하지 않았고 두려움은 잊은 채 서로의 손을 잡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들판처럼 펼쳐진 시민들의 외침은 이 땅의 강줄기를 타고 퍼져나갔다.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다시 일깨우며,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길을 열었다.
이렇듯 그 밤 국회의 결의는 정치인들만의 결단이 아니었다. 거리에서 빛나는 촛불과 메아리친 목소리들, 국회 주변에 운집한 시민들의 단단한 연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군대의 장갑차와 실탄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은 그들의 존재는 역사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었다. 비록 거대한 불길이 아니었지만, 어둠을 불사르지 않았지만, 시민들의 연대가 비추는 그 빛은 충분히 밝았고 따뜻했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시민들의 손끝에서 아주 작은 발걸음으로 다시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증명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오래도록 빛날 것이다.
대중의 머리 위에 있으려는 자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경제, 사회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비상계엄이라는 칼이 우리의 헌정질서를 겨누었을 때, 정부 여당은 침묵과 혼선으로 응답했다. 단순한 무기력이나 방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의 무대에서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퇴행적인 동참이었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폭력의 균형추가 되었고, 계엄령이라는 부조리한 힘을 뒷받침하는 동력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몸을 낮춘 그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책임을 외면하고 스스로 역사의 죄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한동훈의 태도 변화는 정치적 모순의 전형이었다. 계엄령을 반헌법적이라 지적했으나, 탄핵에는 반대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자신의 체포 명령을 알게 된 뒤, 그는 탄핵 찬성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의 변화는 신념이라 부르기엔 너무 가볍고 상황 논리에 매몰된 선택은 정치의 깊이를 외면한 얕은 물살이었다.
그의 여러 행태는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결연한 약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제 몸만을 지키기 위해 일렁이는 바람이었고, 계엄령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탄핵을 부정하는 궤변은 국민의 신뢰를 모으지 못했다. 위험이 자신의 문턱을 넘은 뒤에야 변화한 그의 판단은 생존 앞에서 흔들리는 잎새였다.
더욱 쓰라린 것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의 가결이 이러한 모순적 정치인의 표심에 기대야 한다는 현실이다. 민주주의라는 배를 띄우기 위해 우리는 부서진 노를 잡고, 방향을 잃은 선장을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지키려 하는 민주주의의 무게와 정치의 결핍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런데도, 민주주의가 잉태하고 있는 모순을 넘어야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지나,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함선처럼 국민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우리들의 손에 들린 부서진 노는 역사의 물살을 바꾸는 도구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흔들리는 이들 위에 기댈 수 없다. 오직 국민의 손끝에서만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정부 여당과 야당은 서로 다른 쪽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오월동주와도 같다는 걸 심심찮게 보아왔다. 그 배는 국민이 아닌 권력을 향해 노를 젓고 있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구호로 남을 뿐이었고, 민주주의는 그들 손에서 여러 번 변질되었다. 당리당략으로 벌여온 그들의 싸움은 오래된 연극처럼, 대립을 가장한 협력으로 이어졌다. 민중을 무대 아래 조용히 배제한 채 진행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결코 무대 위의 연극으로만 머물 수 없다. 국민의 삶 속에서, 목소리와 행동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권력의 조율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질, 곧 모든 이가 함께 참여하고 함께 살아가는 질서의 아름다움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화려한 구호가 아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다시금 민주주의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어떤 계산도, 어떤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다운 세상을 향한 작은 희망의 빛이 있을 뿐이다.
밑으로부터의 새로운 전환을 꿈꾸며
“Man is by nature a political animal.” <Political Science> by Aristoteles.
민주주의는 흔들리는 들판 위에서 바람에 꺼질 듯 말 듯 아스라이 타오르는 작은 등불이다. 1894년의 집강소는 현대의 우리를 있게 한 등불이었다. 부패한 권력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어둠 속에서, 농민들은 스스로 손을 맞잡고 자신의 터전을 지키고자 했다.
그 작은 불빛은 억압의 밤을 뚫고 피어났고 그 빛 속에는 질서와 연대,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깊은 염원이 깃들어 있었다. 집강소는 자치 조직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이었고, 평등과 협력이라는 평범하면서도 숭고한 가치를 품은 꽃이었다.
집강소는 실패한 조직이 아니었다. 그것은 눈 내린 들판 위에 첫 발자국을 남기는 용기였다. 코뮤니즘의 이상 또한 거대한 구조물이나 추상적인 설계도로서 흠결이 아닌, 인간애의 연장이었다. 우리가 오늘 그 정신을 되살린다면, 민주주의는 또 한 번 새로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서구 유럽의 코뮤니즘 역시 그러했다. 노동자들이 단결하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던 그들은, 공공의 가치를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고자 했다. 코뮤니즘의 연대와 평등의 정신은 집강소의 숨결과 조용히 교감한다. 먼 대륙에서 태동한 두 정신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를 가로질러 한 줄기 강물처럼 어딘가에서 만난다.
하나는 유럽의 공장 지대에서 솟아난 아침의 태양 같았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들녘에서 자라난 흰 들꽃 같았다. 그러나 그 본질은 하나였다. 인간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밝은 길을 만들려 했다는 것.
오늘날, 우리는 다시 그 길을 걸어야 할 때를 맞이했다. 민주주의의 터전은 부패와 권력의 허울에 갇혀 점점 더 희미해져 간다. 그러나 집강소와 코뮤니즘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속삭인다.
권력은 위로부터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그것은 강요되는 질서가 아니라, 스스로 세우는 정의라고. 이 고요한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어둠을 뚫고 다시 떠오르는 그 빛은 눈처럼 흰 평등의 결을 띠며, 바람처럼 자유롭게 흐를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담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