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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Aug 11. 2016

완전한 타인

알베르 카뮈 <이방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인터넷 검색창에 '뫼르소 사이코패스'를 검색해본 일이었다. 다행히 검색 결과가 몇 개 있는 걸 보니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왜 '뫼르소'같은 인간이 주인공인 책을 읽어야 하는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뫼르소라는 인간에 대해 티끌만큼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도 책을 읽으며 느끼는 이러한 거북한 감정들은 작가인 카뮈가 책을 쓰면서 이해와 공감의 '결여'를 가장 중요한 주제로 잡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뫼르소는 제목과 달리 전혀 '이방인'이 아니다. 그는 평범한 프랑스의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이며, 이야기는 프랑스라는 뫼르소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그는 1인칭 시점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이 사는 세상을 독자에게 안내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의무를 행하는 자라면 이 책의 제목은 결코 '이방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뫼르소는 유명한 문장으로 당차게 독자들과 심적인 결별을 시작한다. 그것도 첫 번째 문장으로 말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인지도. 나도 모르겠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타인'이지만, 뫼르소에게 엄마의 죽음은 결코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엄마라는 타인의 죽음을 성가시게 생각한다.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누가 안 보면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차라리 공감이 되는 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그 잔인한 문장 쪽이다. 적어도 그 문장에는 가족에 대한 증오라는 '감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책 중반을 넘기면서까지 뫼르소가 본심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낱같은 기대를 놓지 않았지만 그건 뫼르소에 대한 전적인 오해일 뿐이었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책과 소통하고 싶어서이다. 주인공과 소통해야 하는 소설에서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이 자신의 감정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 없이,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을 열거할 뿐이라면 소설 속 화자와 공감을 기대한 독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주인인 화자가 독자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의 소설이 주인공이 나쁜 짓을 저질러도 그가 그동안 살아왔던 배경이나 동기를 알게 되면서 동정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과는 반대이다. 따라서 <이방인>을 끝까지 읽어도 뫼르소와 나의 거리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다른 소설에서 단 한번 등장하고 마는 주변 인물보다도 더 멀게.


뫼르소는 두 번째 죽음을 만난다. 그것은 뫼르소가 한 아랍인을 살인하게 되는 적극적인 죽음의 형태이다. 가족이라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서도 그랬듯,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죽은 이에 대한 동정이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뫼르소는 그렇다. 그는 살인을 하게 된 순간에 대한 묘사에서 죽은 아랍인을 왜 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 순간의 멈춰진 듯한 세계를 절묘하게 그려내지만,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보아도 그 살인에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 여지는 없는 것이다.  


나는 권총 손잡이의 매끈한 배를 느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날카롭고 귀청이 터질 듯한 소음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햇볕을 떨쳐 버렸다. 나는 내가 한낮의 균형을, 스스로 행복감을 느꼈던 해변의 그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미동도 않는 몸뚱이에 네 발을 더 쏘아댔고 탄환은 흔적도 없이 박혀버렸다.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같은 것이었다. 


그가 죽음에 대해 비로소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은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게 된 때다. 엄마가 죽은 다음 날,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면서 여자를 만나고, 며칠 후 한 사람에게 다섯 발의 총을 쏴 죽인 죗값으로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그는 다른 이의 불행에는 그렇게도 무감각하면서, 자신의 불행과 고통에는 그 누구보다 섬세한 감각을 내세운다. 그가 자신의 죽음 속에서 더 많은 철학적인 생각과 기억을 끄집어낼수록 오히려 그에 대한 반감은 더 커져만 갔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이나, 아랍인의 죽음 앞에서 이런 고뇌를 한 번이라도 했더라면, 그의 죽음 앞에 이렇게 냉정한 독자가 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말년에 "약혼자"를 갖게 되었는지, 왜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시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거기에서도, 삶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그곳 양로원에서도, 저녁은 쓸쓸한 휴식 같은 것이었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을 곱씹을수록, 소외되어 있는 것은 뫼르소 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뫼르소가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내가 뫼르소에게 공감하기 싫어하는 것은 비단 소설 속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에 타인에 대한 완벽한 공감과 이해는 없다. 내가 애초에 뫼르소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뫼르소가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는 기준으로 우리는 다른 이에게 잣대를 들이민다. 그런 의미에서 뫼르소는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극도로 꺼렸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내가 어떤 행동과 생각을 하든 그것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줄 수 있는 여부는 타인 내부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나라는 세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우리는 어쩌면 모두 이방인이다. 내가 뫼르소를 이해할 수 없고, 뫼르소가 타인을 성가시게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 없이 서로는 한 움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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