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의 의미

영화 <컨택트>

by 김세원

좋아하는 김홍도의 그림 중에 <마상청앵도>라는 작품이 있다. 그림을 처음 보면 한자들이 눈에 먼저 띈다.


꽃 아래 佳人은 천 가지 황의 혓소리 내고 시인의 술독 앞에는 두 알의 귤 보기도 좋네.

언덕 위 버들가지 새를 어지러히 오가는 저 꾀꼬리, 안개와 비를 엮어 봄강을 짜는 구나.


이런 뜻이라고는 하는데, 한자에 까막눈이라 짐짓 모른 체하고 옆으로 눈을 돌리니 한 사내가 보인다. 그는 말 위에서 무언가를 보기 위해 서 있다. 영화 <컨택트>를 보고 나니, 나도 모르게 이 그림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회상은 일반적으로 ‘지난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땐 그랬었지. 하는 기억과 함께 불러일으켜지는 아련함. 주인공 루이스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를 회상할 수 있게 된다. 루이스의 능력은 다른 타임슬립 물처럼 미래를 되돌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루이스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살게 된 새로운 삶의 방식일 뿐이다.

옛날 그림은 내가 본 것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이 아닌,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 그 시대 사람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썼으니까.


그 얘기를 듣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면, 내가 <마상청앵도>에서 가장 먼저 바라보게 되는 것은 한자가 아니라,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작은 새 한 마리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길을 지나던 선비가 보인다. 그는 꾀꼬리가 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길을 가다 멈춰 서서 새가 앉아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봄에 걸맞은 시 구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야 나는 마치 선비가 그랬듯 새 한 마리를 만나 봄을 느끼게 된다. 아름다운 시 구절과 함께.


생각하는 대로 산다는 것은 프랑스 시인의 명언 ㅡ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by 폴 발레리— 에서처럼 의지의 문제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또한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루이스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가지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마 규정화하지 않아서 그렇지, 세상에는 약 71억 개의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을 거라, 나는 생각한다.



어떤 행동을 하는 순간, 그 미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면 우리의 의지로 그것을 바꿀 수 있을까? 바꿀 수 있다면 이미 그에 따른 미래가 그 결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것은 아닐까? 아니면 원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페르마의 원리에 따라, 우리가 선택한 것이 바로 그 선택일지도 모른다.


루이스가 딸을 잃게 될 미래를 목격했음에도 결혼을 선택하고 딸과의 소중한 시간을 소중히 살아내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루이스의 미래는 이미 벌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시간 순으로 현재보다 뒤일 뿐인 것이다. <마상청앵도>에서 우리가 한자를 먼저 감상하든, 꾀꼬리를 먼저 감상하든 그림이 그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먹살힘(먹고살기 힘들다)을 외치면서도 우리는 살아간다. 언제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의 인생이 내 것보다 훨씬 행복해 보이면서도, 우리는 함부로 극단의 선택을 내리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오직 루이스만 모든 것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