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원 Sep 06. 2017

대학생의 평일같은 에세이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의 에세이는 대학생의 평일같다. 너무 극적이지도 않고, 일부러 억지스런 감정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담담히 나열하면서 느낀 생각을 공유할 뿐인데, 그 에세이를 읽는 나는 누군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한없이 녹아버리고 만다.  


사실 이 책을 읽는데에는 1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처음 읽기 시작했던 것은 작년 봄의 도서관이었다. 그 당시에도 나는 김연수 작가의 책을 좋아하고 있었다. 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렀다가 '지지 않는 말'을 꺼내들곤 그대로 선채 한없이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100페이지가 되기 전에 그 책을 다시 꽂아놓았다. 다시 집어넣기 전엔 구절이 너무 좋아서 책을 꼭 끌어안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한번에 다 먹어치우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 이상은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이 책은 나중에 다시 읽고싶어지는 날에 읽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곤 집에 돌아가 책을 주문하고 1년쯤 책장에 고이 간직해 두었다. 회사에서 지치거나 화났던 날도, 슬퍼서 우는 몇날도 이 책을 꺼내지 않고 흘려보내곤 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지 않는다는 말'을 다시 만났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의외로 평온해진 마음으로 책을 집어들었다. 1페이지부터 다시 읽는데 아무리 천천히 읽으려고 해도 이틀만에 책은 끝이 나 버렸다.

그중 내 삶에 가장 큰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p9


지난 한 해 나는 정말 힘든 시기를 거쳐 왔다. 내가 힘들었다면, 그건 당신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힘들기만 했다면, 겨울까지 우린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어려운 일 못지않게 즐거운 일도 많았다. 그 사실은 이 겨울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증명한다. 바람이 매서우면 매서울수록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겨울다운 겨울에 우리는​ 우리다운 우리가 된다. -p79

40대가 되었음에도 김연수가 항상 청춘 작가로 회자되는 까닭은 그가 본인의 청춘을 독자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기 때문이다. 그의 청춘은 초등학교때부터 30대까지 우리가 한번쯤은 겪었을 법한 경험들로 이루어져 있다. 성공한 작가로서 후대를 내려보는 영웅심리 같은 건 배제하고,  '어릴 때 고생은 사서 한단다' 같은 폭력적인 말도 결코 내뱉지 않는다.

고통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별것 아닐지언정 겪는 사람에게만큼은 가장 아픈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경험이 아무리 초등학교 때 있었던,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을 사소한 고통이라도 말이다.  

두고 본 결과, 그 선배의 말은 맞았다. 과연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알래스카에 가서 오로라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오로라는 딸아이가 하는 닌텐도의 게임 '동물의 숲'에서 간신히 보고 있는 실정이다. (중략) 그러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고 해서 하기 싫은 일을 반드시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으니까 하기 싫은 일은 더구나 하지 말아야지. -p83



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리는 눈이 아니라 쌓인 눈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어른이 되는 듯하다. 내리는 눈이 아름다운 줄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쌓이고 났을 때, 일어나는 일도 잘 알고 있다. 눈이 내린다고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게 바로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다. 열흘 붉은 꽃 없다는 생각. 그래서 우리는 매달 보험료를 지불하고, 아이들을 더 많은 학원에 보내고, 여윳돈이 생기면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이다. 앞으로 찾아올 힘든 시절을 좀 덜 힘들게 살기 위해서 지금의 행복을 보험금으로 지불한다. -p148



행복과 기쁨은 이 순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즉각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우리를 기다리는 행복과 기쁨이란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겨울에 눈이 내린다면, 그날은 행운의 날이다. 내일의 달리기 따위는 잊어버리고 떨어지는 눈이나 실컷 맞도록 하자. -p151

내가 스무살이었으면 읽을 때에는 좋은 책인지 모르고 읽었을 것이다. 어쩌면 서가에게 몇페이지 넘기다가 시시하다며 다시 꽂아놓고 지나쳐버렸을 수도 있다. 대학생인 나에게 한가로운 한낮의 시간같은 평화란, 지금도 앞으로도 끝이없는 것처럼 널린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년이 흐른 지금은 이 책 한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너무나 아깝다. 나에게 성공의 삶을 강요하지도 않고, 죽을때까지 노력하라고 하지도 않고, 그냥 저냥 본인이 노력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평범한 날들을 감사히 여길 만큼만 행복하게 살라고 책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기에.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의 안과 밖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