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원 Oct 26. 2017

직업으로서의 집사, 그리고 인생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을 다 읽고나서 왠지 엉뚱한 상상을 했다.

만약 노벨문학상이 사람이 아닌

작품에 수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남아있는 나날>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면
주인공 스티븐스의 현현이 단상위에서 청룡영화상에서 천우희씨가 했던 소감을 그대로 읊조릴 것만 같았다.

"유명하지 않은 내가 이렇게 큰 상을 받다니. 나에게 이 상을 주신게 포기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집사' 일을 하면서 의심하지 않고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하겠습니다."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집사의 역할이란

대개 항상 주인공의 뒤에 서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인공의 상황이나 배경을 설명해주는

소모적인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아있는 나날>에선

집사 1인칭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주인공의 직업인만큼 집사라는 직업의 특성은

이야기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집사에게는 주인어른을 보필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다.
중요한 일을 하는 주인이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다른 목표는 없다.
그들은 마치 응접실의 깨끗한 벽지인 양

무생물이나 배경처럼 못보고 못들은 척 하고,

주인의 명령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복종한다.


그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결국 자신의 인생을 망칠 지언정 말이다.


"스티븐스 씨, 당신이 그런 생각을
작년에 털어놓았다면
저한테 얼마나 힘이 되었을지 알기나 하세요?
제 수하 처녀들이 해고되었을 때
제가 얼마나 심란했는지 뻔히 알고 계셨잖아요. 당신이 한마디만 해주었어도
큰 도움이 되었을 거에요.
말해 보세요, 스티븐스 씨.
당신은 왜, 왜, 왜 항상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살아야 하죠?"

그가 시치미를 떼는 것은

주인이 시키는 일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이다.
그러나 스티븐스가 집사로서 살아가는 방식은

그가 존경하는 그의 주인 달링턴 경이

그토록 혐오하는 '프로페셔널리즘'과 닮아있다.


"당신이 말하는
'프로페셔널리즘'이란 것에 대해선
나도 꽤 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속임수와 조작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선과 정의의 승리를 희구하기보다
탐욕과 이익을 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지요.
선생이 말하는 '프로페셔널리즘'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관심도 없을뿐더러
굳이 갖추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직업의 프로페셔널함이

대의를 위해 개인의 신념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이것은 비단 집사가 있었던 시절 스티븐스의 고민거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회사의 한명의 사회인으로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이나 '부조리함'을 견뎌낸다.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프로페셔널리즘'을 갖춘 사회인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노인이 자리를 든 후 20여분 지났지만
나는 방금 막 치러진 이벤트,
즉 선창의 전등에 불이 켜지는 행사를 기다리며
계속 이 벤치에 앉아 있다. 즐거움을 찾아
선창에 모여든 사람들이 이 작은 이벤트 앞에서 행복해하는 걸 보니,
앞서도 말했듯 대다수 사람들에게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때라고 한
 내 말동무의 이야기가 정말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제 뒤는 그만 돌아보고
좀 더 적극적인 시선으로,
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잘 활용해 보라고 한
그의 충고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하긴 그렇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중략)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꽤나 많은 것을 잃고

여행 끝에 무언가를 깨달은 스티븐스는

또다시 짐짓 시치미를 떼며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 모습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면서도

그의 남은 생이 안타까워 책 속으로 들어가

그를 말리고 싶은 지경이다.

그러나 수십년동안 집사로서의 인생을 산

스티븐스를 비난하려면

꽤나 많은 자아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스티븐스의 남은 날보다는

나 자신에게 남아있는 날들이나 신경 쓰라며
스티븐스의 '너나 잘하세요'라는 일갈이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쌀쌀한 겨울에 만나는 핫팩만큼 따뜻한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