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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Nov 21. 2017

남미의 눈으로 하는 이야기

에두아르노 갈레아노 <시간의 목소리>

카리브해 여행에서 가장 강렬하게 깨달은 사실은 바닷물도 따뜻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냥 시원하고 차가워 보이는 민트색 바다에 발을 담그는 순간, 누군가 나를 위해 적당히 데워놓은 듯한 바다의 온기는 자연이 내게 보내는 환대인것 같아 기분이 몽롱해져왔다.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은, 아무리 상상해도 내 상상 너머에 있는거구나.'하고 잠시나마 깨달았던 것 같다.


우루과이의 저널리스트 에두아르노 갈레아노가 쓴 <시간의 목소리>를 통해 남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저마다 1페이지를 꼬박 채우기엔 인생에 재미있는 일이 많다는 듯  여백의 미를 내세우며 휑뎅그러니 공간을 메운다.


문장을 읽기 시작하면 습하고 덥고, 자연으로 빽빽한 수풀을 걸어가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곳에서 나는 이제껏 보고 듣지 못한 사실일지도 모를 이야기들을 마주했다. 이야기의 생명력이 넘쳐나 읽고있는 종이에서 줄기가 솟아날 것 두려움이 들 때도 있었다.


모든 것은 단순히 이렇게 귀결된다. 더 설명할 것도 없이,
두 번의 날갯짓 사이에서 여행이 지나간다.
- p14

그의 생일이 몸통에 그려 놓은 반지가 여럿이다.  -p119

이런 문장을 읽고 쓰기 위해 끊임없이 받아쓰기를 해왔던 건 아닐까. 나무에 그려진 나이테를 이렇게나 아름답게 표현하는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나는 몇번이고 책을 쓰다듬었다.


그의 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만지고, 불명확한 것들을 그려낸다. 마치, 한국의 산수화에서 공간의 여백으로 구름과 하늘을 표현하듯이 말이다. 글은 마치 허리를 잘라놓은 것처럼 짧고 허무하게 끝날때가 많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허무'에 대해 그 어떤 장황한 글보다 본능적으로 깨닫게된다.


4백만년 남짓 전에 아직 유인원에 가까웠던 여자와 남자가 두 발로 일어서서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 사이에 난생 처음 얼굴을 맞대고 서로 마주보는 기쁨과 공포를 경험했다.(중략)약 30만년 전에 여자와 남자는 최초의 단어를 말했고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그 상태에 머물러 있다. 둘이 되기를 원하고, 두려움으로 죽어 가고, 추위로 죽어 가며, 또 단어를 찾고 있다.
- p131



"제게 편지 한 통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연애편지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요?"
그걸 알면 선생님께 부탁드리지 않죠.
엔리케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날 밤 그는 연애편지와 씨름했다. 다음 날 벽동골이 편지를 읽었다.


이거에요. 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바로 이거였어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이거라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 p134



삼십여년을 서울에서 자란 나는 가보지 않은 세련된 도시들에 대한 풍경은 얼마든지 공감하고 또 얼마쯤은 지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미는 다르다. 지구를 반바퀴쯤 돌아야 갈 수 있는 시간의 거리만큼 페이지를 한장씩 넘길때마다 미지의 공간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경치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911사태로 트윈 타워가 붕괴되고

몇 달 후에 이스라엘이 예닌을 폭격했다.

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은 폐허 더미 아래 시신이 널려 있는 거대한 구덩이로 변했다.
예닌의 구덩이는 뉴욕의 트윈타워가 남긴 것과

똑같은 크기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

잔해 더미를 파헤치는 생존자들을 빼면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 p340


에스키모인은 눈을 52가지로 나눠부르듯,

핀란드에는 오로라 세기에 따른 오로라지수가 있듯,

뜨거운 나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남미에서 날아온

자연의 섭리와 사회 문제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은

그 어떤 여행보다 진한 여운과 생각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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