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말하다>
김영하가 말하는 최고의 소설이란 '다 읽었는데 밑줄을 친 데가 하나도 없고, 그럼에도 사랑하게 되는 소설'이다. 이 문장은 나에게 주문이 되어 <말하다>를 보는 내내 인상깊은 구절을 한마디도 체크할 수 없었다. 대신 쫓아오는 잠을 쫓으며 책 속으로 자꾸만 빠져들었다. 그리고 삼일은 굶었다가 사료를 받아먹는 강아지처럼 게걸스럽게 책장을 넘겨댔다.
내용 중 가장 상깊었던 이야기는 혼자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에게는 어둠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대학교의 단체를 지향하는 행동양식과는 멀리 떨어진 이야기였다. 학생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이 두려워 대책없이 굶던 시절이 생각났다. 친하지도 않은 학과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하하호호 하고 집에 가는 날은 어쩐지 더 외로워지는 기분을 지하철에 앉아 부러 외면하던 날들이기도 했다. '어릴 때 만난 친구들은 가깝기 때문에 좀더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문장을 그 때 읽었더라면, 스무살 언저리 생일에 엉엉 울었던 추억은 굳이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김영하는 나에게 어른이다. 사회에서 만난 어른들은 왜 어른처럼 살지 않냐며 의아해했다. 그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앞서 살아온 사람이 그렇듯 인생의 트랙위에 기차처럼 올라가서 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영하 작가의 이야기는 다르다. 김영하는 지금 세대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알고 이를 걱정해준다.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방법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견디라고 너무나 쉽게 말하는 이 사회에서('옛날에 나는 더한 일도 겪었거든') 그의 이야기는 어른에게 들을 수 있는 최후의 구원이었다.
사실 김영하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나온 대부분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동안 김영하 작가가 했던 강연과 인터뷰를 편집해 출간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문장은 직접 강연으로 보고 들었던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로 읽는 것은 다른 결로 다가오기 때문에 새롭고 낯설었다.
말은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글로 옮겨적으면 흉터처럼 머리 한구석이 움푹 패인다.
내가 좋아하는 김영하와 김연수 작가는 둘 다 내게 깊은 영향을 끼쳤지만 문장과 이야기의 스타일은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다.
김연수 작가는 보드랍고 겸손하지만 글을 읽다보면 결국엔 나와는 다른 몇걸음 앞에 나간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된다. 반면 김영하 작가는 건조하고 뾰족하지만 결국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구나 하고 안심하게 만든다.
김영하 작가는 책 말미에 '이 책이 비록 대답의 형식을 띠고 있더라도 본질은 질문'이라 말하였다.
그러나 이 책이 질문이라는 본질을 갖고 있었을 지라도 책을 덮으면서 어쩐지 김영하 작가에게 인생에서 마침표 하나를 건네 받은 것처럼 위로가 되었다.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좋다'라는 의미에 가둬두기 어려울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