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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Jan 28. 2018

우리는 천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영화 <위플래쉬>


일반적인 음악영화의 스토리는 이렇다. 악기는 만져본 적도 없는 한 어수룩한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대회에 나가 실력을 인정받는다거나, 오합지졸이었던 한 무리가 여차 저차 해서 남들에게 감동을 주는 연주를 하게 되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


<위플래쉬>는 이런 평범한 영화의 기-승-전-결을 모두 파괴하고 시작부터 관객들을 긴장의 '전' 상태로 끌고 들어가 관객들은 그야말로 영화의 스토리에 '질질' 끌려다니게 된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팝콘을 사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팝콘을 씹기는커녕 콜라 마시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야말로 숨죽이며 영화를 관람했었다. 제목인 <위플래쉬>가 가진 채찍질이라는 의미처럼 두 시간 동안 영화가 괴물처럼 뿜어대는 영상과 소리에 흠씻 두들겨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주인공 앤드류가 타고난 천재인지에 대해 묻는다면  답은 '그렇다'이다. 어떤 분야이든 성공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집념. 바로 그 마인드야말로 태어났을 때부터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 천재란 단어는 성공에 대한 욕망이나 집념을 애초부터 타고나지 못했기에 먼 단어인 것이다.


<위플래쉬>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친히 '네가 천재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아니?' 하며 그 속을 뒤집어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천재들에 대해 노력 없이 놀기만 하다 무엇이든 시작하기만 하면 미다스의 손처럼 손대는 즉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음악/미술 분야의 천재들이 그 반열에 오르기까지 겪어야만 했던 육체적/심리적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단순하게 그들이 남겨놓은 유산을 향유하기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앤드류의 선생인 플레쳐 교수 역시 이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플레쳐 교수는 천재란 그가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만 있다면 일정한 능력 이상의 누구라도 다다를 수 있고, 그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은 그만큼 노력하지 못했기에 루저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플레쳐 교수의 생각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 사실 성공하고 싶어 하는 욕망 자체가 선천적이라는 것, 두 번째 오류는 자신이 그런 천재를 도와주는 조력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해봤다면 플레쳐와 비슷한 꼰대들을 만나봤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가하는 언어적 고통은 누군가로 하여금 자살로 내몰 수 있지만, 그들 중 몇몇이 실제로 자살하는 그 순간에도 꼰대들은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 사실을 알려줘도 외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수백수천의 피해자 중 이를 악물고 노력하여 성공의 반열에 오르는 자 앞에 서서 꼰대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끌어와 '내가 쟬 가르쳤다'며 떠벌인다.


마지막 공연 장면에서 카메라의 시점은 우리가 주인공 뒤에 있는 연주자, 혹은 주인공 앤드류 자체인 것처럼  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마지막 10분에서 주인공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완벽히 깨닫게 되었다.


나는 절대 천재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절대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지 않다.

최고로 인정받기까지의 그 고통을 절대로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고통의 일부인 플렛쳐 교수가 치는 뒤통수는 가히 위력적이라 바라보기만 하는 나조차도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였다. 영화 <위플래쉬>는 단순히 천재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천재가 되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지옥도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시커먼 어둠 속에서 느꼈던 타인의 고통과 그에 따른 전율,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공존하는 약간의 희열.


짧으면 일주일 길면 몇 달 후면 생생했던 그 감정은 희미해질 것이고 그것 만으로도 내 인생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러니까 평범한 하루를 보내며 가끔 <위플래쉬> 같은 대단한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소시민으로 사는 것으로 만족스러울 것이다. 내 인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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