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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Mar 25. 2018

지나갔기에 빛나는 과거

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미, 솔,
도레미파솔..

음계를 읊어본다.
따로 읊을 때에는 잘 안되더니, 도부터 차례대로 부르니 소리가 얼추 이름에 맞는 음계를 찾은 것 같다.


I Love Love


주인공 '나'가 흔들리는 여자친구를 잡기위해

한국에서 미국까지 단박에 날아오고, 그렇게 둘이 뉴욕에서 만나

산타크루즈까지 쉼없이 드라이브를 하며 왔다는 사실로 팸이모는 단번에 눈치챈다.


사랑의 깊이를 굳이 말로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모는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동물적 감각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은 자신의 여자친구와 얼마나 사랑했는지,

드라이브를 열시간도 넘게 하던 시간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있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이 결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라는 담백한 문장으로

긴 드라이브를 설명한다.


팸이모는 언제나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장감독과의 밀애가 부도덕한 것이어도,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굳이 지우거나 왜곡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장감독과 가족을 마주한 서귀포에서의 마지막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순간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팸이모는 너무나도 모범적으로

열정적인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사랑의 무게를 이해하는 것이다.


I Love Past


주인공이 이모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은

책 속 다른 단편 '벚꽃새해'에서

골동품을 파는 아저씨가 해주는

'병마용'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는 남녀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이모의 이야기는 훨씬 가까운 과거에서 온 것들이지만,

과거는 우리는 경험하지 못하고

그저 들을 수 있을 뿐인,

그러나 한 때

누군가의 인생을 강렬하게 흔들었던 시간들이다.


‘벚꽃새해’에서 병마용와 시계를 비롯한 골동품들이

과거를 상징하는 물건이라면,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과거를 상징하는 소리이며,

‘서귀포’는 팸이모의 과거를 상징하는 장소가 된다.

과거란 언제부터일까?

폴과 이모가 포도주를 마시며 행복해하던 시절부터?

아니면 팸이모가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던 시절?

그것도 아니라면 골동품이 골동품이 아니었던 시절?


분명한 것은,

모든 과거는 현재로부터 조금씩 떨어져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팸이모의 과거는

각각의 세계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여러가지 과거들이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있다.


팸이모는 새로운 사랑이 생겼다고 해서

헌사랑을 무시하거나 등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모에게 서귀포는

장감독님과 누워서 도란도란 빗소리를 들었던 장소임과 동시에,

폴이 환생하기를 기원하는 장소가 된다.


이모는 폴이 사랑했던 포도주를

나와 나의 여자친구에게 나눠준다.


심지어 폴과 결혼했던1984년을 기념하는

포도주의 마지막 한병은 장감독의 아들과 나눠마시며,

과거를 회상한다.

현재 곁에 장감독님도, 폴도 없는 팸이모에게

과거는 얼핏 상실된 것처럼 보인다.



I Love Present


그러나 주인공 나와 장감독의 아들은

과거로부터 넘어온

현재이다.


이모는 마지막으로 남았던 그 포도주를 다 마심으로써,

과거를 과거로 떠나보내며

다가올 미래를 기대한다.


그것은 과거에 갇혀 사는 사람도,

과거를 잊고 미래만 바라보는 사람도 아닌,

성숙하게 과거가 과거임을 인정하는 어른의 자세이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결국 과거를 의미한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흐릿해진 과거는,

실제 모습이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아름답고, 그리운 것'으로 화석처럼 남는다.

그리고 과거는

더 이상 우리가 어찌할 수 없기에 소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과거는

현재의 우리가 우리일 수 있도록 돕는다.

미, 솔

음계를 읊어본다.
소리는 이미 내 입을 떠나갔는데,

어디선가 함석지붕의 빗소리가

구월의 시처럼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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