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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섭 Mar 29. 2019

죽음으로 쌓아올린 인류의 역사 - <살인마 잭의 집>

<살인마 잭의 집>의 질문과 라스 폰 트리에의 반성


1. 질문






20세기가 막 시작되던 1900년, 초기 영화 연구가 조지 알버트 스미스는 <The house that Jack built>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1분밖에 안되는 이 영화의 반은 여자 아이가 이미 만들어놓은 장난감 성당을 남자 아이가 손가락으로 무너뜨리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반은 무엇이냐 하면, 이를 되감은 장면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벽의 해체>(1896)에서 최초로 시도했던 영상의 되감기를 활용했다. 이 영화의 완성은 그러나 이의 제목이다. 잭(남자 아이)이 ‘지은’ 집. 영화의 후반 되감기 장면은 <벽의 해체>의 그 장면과 다소 다르다. <벽의 해체>에서는 화면을 가득 채웠던 자욱한 연기가 다시 빨려들어가거나 인부의 작업 모습 등이 다소 길게 이어지며 이것이 앞 장면의 되감기임을 끊임없이 자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The house that Jack built>에서는 전반부에서 잭이 장난감 성당을 한 손가락으로 여러 번에 걸쳐 무너뜨린 덕분에, 후반부에서 마치 메리 포핀스가 청소하듯 가벼운 터치로 성당을 쌓아 올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후 20세기의 100년은 아주 길었다. 두 번의 큰 전쟁, 세계 곳곳에서 이어진 또다른 전쟁, 그리고 남의 나라 군대가 죽인 만큼 같은 나라 정부가 벌인 고문과 학살까지. 이들이 권력에서 사라진 지금 2019년의 영화 관객은 대부분 이를 책이나 TV, 영화에서 보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미디어에서는 물론 히틀러, 스탈린, 안와르 콩고 등의 인물들은 인류사에 다시는 등장해서는 안될 문제적 인간으로 묘사된다. 마치 특정 역사적 상황에 예외적으로 생겨난 인물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나쁜 일들을 했는지 보고 배우고, 그들이 얼마나 끔찍한 인간들인지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는 것. <살인마 잭의 집>의 질문은 여기서 출발한다. 당신은 정말 다른가?






<살인마 잭의 집>에서 던지는 질문 중 가장 쉬운 것은 폭력, 살인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이다. 버지가 알기 쉽게 설명했듯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을 영화로 관람하여 해소하는 대리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는 길티 플레저라는 용어로 정립될 만큼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이미 <퍼니 게임>이나 <웨스트월드>가 날카롭게 고발한 바 있다. 익숙한 예시는 또 있다. 박제의 경우는 우리에게 더욱 가까운 예시다. 지금에서야 교육, 학술용이라는 명분으로 제작된다 해도(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BBC의 <지구> 시리즈가 더 교육적일 것 같다는 점을 잠깐 상기하자) 이전에는 완전히 전시, 장식용이었다. <싸이코>에서 박제된 새로 가득찬 노만 베이츠의 방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살인마 잭의 집>의 인간 박제는 극도로 혐오스러워하고 <싸이코>의 새 박제에는 그만큼의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노만의 박제는 깔끔하고 잭의 박제 실력이 어설퍼 결과물이 이상해 보이기 때문인가?







하지만 우리는 18세기 스웨덴에서 미숙한 실력으로 제작된 그 유명한 사자 박제는 외면하지 않고 코미디로 삼는다. 잭의 박제를 기피하는 근원적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박제된 아이 외의 다른 가족들이 트로피 사냥당한 동물들과 함께 전시되는 장면에 이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트로피 사냥은 박제보다는 최근 들어 사람들의 지탄을 더 받는 활동인 점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일종의 도덕적 면허를 부여한다. 나는 저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는 박제 산업을 방관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살해 행위를 방조한 관객의 양심을 겨냥한다.








범죄 영화 관람, 트로피 사냥에 대한 익숙한 불편함을 제시하며 관객에게 도덕적 면허를 부여하는 <살인마 잭의 집>은, 이후에 단계적으로 관객에게 죽음을 전시하는 박제, 죽은 포도를 방치해 단맛을 얻는 와인, 죽은 나무를 자재로 짓는 집을 제시하며 관객이 갖고 있는 도덕적 면허가 진정 유효한 것인지 끊임없이 묻는다. 이들 모두는 엄연히 생명의 죽음을 토대로 그 미적 가치와 역사가 형성되었지만, 그 '자재'들의 생명에 대해 이야기된 적은 놀라울 정도로 없다. 인간은 그'것'들이 모두 그렇게 만들어지도록 의미를 갖고 태어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마 서먼이 공구 ‘잭’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인간이란 이들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기 위해 창조되었는가? 라고 이 영화가 관객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영화를 여는 시퀀스의 일부로 아주 적절해 보인다.








2. 반성






잭이 표상하는 인간은 자신의 추악함을 감추기 위해 어디에서나 쓰일 수 있는 포괄적인 은유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해 이를 포장할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시체로 이루어진 창고의 집은 학살로 쌓아올린 인류의 역사를 은유함과 동시에 타 생명체의 죽음을 미적 가치로 환원하여 이를 즐기며 고귀하고 교양 있는 척해왔던 인간의 역사를 들춰낸다. 히틀러 등이 등장하는 자료 화면이 지나갈 때 어떤 면에서 이는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의 역사와의 접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2011 칸 영화제에서 그 자신이 직접 나치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으로 영구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잭에게 직접적으로 당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여성(혹은 아이)라는 점 역시 이 시점에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둠 속의 댄서> 촬영 중 비요크에게 성추행을 시도했다는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중간 별안간 되감기 되는 장면은 119년 전의 그 장면과 함께, 폭력과 살인으로 인류가 쌓아올린 역사, 그리고 스스로 이어온 경력에 따라다니는 범죄적 행동과 잘못된 발언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영화가 제기한 모든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다.





인간이 예술과 종교에서 끊임없이 천국과 지옥을 탐구했던 것은 천국으로의 희망보다는 지옥으로부터의 공포 때문일 것이다. 이승에서의 전성기 때는 신이라도 된 것인양 생명과 죽음을 도구로 삼던 인간이 자신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신의 축복을 바라며 지옥으로부터 도망쳐 천국의 들판으로 향하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 지옥을 피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지옥에 떨어질 때야 깨달을 정도로 인간은 어리석다. 이 후반부를 보면서 <살인마 잭의 집>이 이미지 외의 전혀 다른 면에서 오히려 더 섬뜩해보였던 것은, 이것이 마치 라스 폰 트리에의 유언장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 원작과 달리 여기의 오마주 장면에서는 관객을 직시하는 인물이 없는데, 관객-다른 모든 인간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스스로의 잘못에 대한 벌을 받겠다는, 마치 죽기 직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과 같은 태도마저 엿보인다. 결국 ‘빛 속의 어둠’, 자신 안의 사악함을 인정하며 지옥불에 떨어지는 형벌로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을 처벌한다.






인도네시아 학살로 인류의 추악함을 묘사하지만 CIA와 미국의 책임을 교묘하게 외면한 <액트 오브 킬링>으로부터도 멀리,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 했던 개인을 다룬 <님포매니악>으로부터 수 백 억 걸음 확장해, 살해 행위로 만 년의 역사를 이룬 인류를 이야기하는 <살인마 잭의 집>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관객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묻는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일단은’ 라스 폰 트리에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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