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들의 섬>
용접슬러그에 얼굴이 움푹 패고, 눈알에 용접 불똥 맞아도 아프다 소리도 못했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을 주면 공업용수에 말아 먹어야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 달 잔업 128시간에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매일 저녁 8시까지 일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 송경동, <85호 크레인과 김진숙>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떻게 버텼을까.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아니 못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들은 노예였다. 노동법이 보호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였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시 대한조선공사는 청년들의 꿈이고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안에서 도저히 못 하겠다 싶고, 이건 아니다 느껴져도 ‘조선소맨’이 되는 거니까, 그 큰 배를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직업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참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자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의 섬'에 사는 노예들이 처음으로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최근 있었던 한진중공업 노조의 투쟁에 대한 소식을 많이 접했다. 이를 포함해 <그림자들의 섬>은 저 멀리 1970~80년대부터의 한진중공업 민주노조에 대한 기나긴 역사를 되짚는다. 그들의 투쟁은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의 한 대표적 흐름 중 하나이다. 쥐똥이 도시락 뚜껑에 있는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그릇을 한 쪽에 쌓아두며 싸워 새로운 화장실과 식당을 얻어내기도 했다. 동료들의 해고를 막으려 크레인에 오르고 목숨을 잃어가며 사측의 일방적 조치에 대한 철회를 얻어냈다. 하지만 사측은 훨씬 집요하고 철저했다. 필리핀에 새 조선소를 지어 일감을 전부 옮기고, 싼 인건비로 현지인들을 부려먹으며 한국의 노동자들은 해고하려했다. 언론은 기업의 원활한 경제 활동을 위해, 한국의 경제를 위해 필요한 선택이라 했다. 우리도 그랬다.
요 근래 사람들 사이에서 ‘노동자’라는 말은 그 신성한 의미를 좀처럼 되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 이름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불법적 폭력을 일삼는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처럼 쓰여진다. 요즘도 언론에서는 ‘강성노조’라는 단어를 흔히 볼 수 있고, 이와 같은 프레임이 씌워진 기사를 읽는 우리들 또한 노동자의 조합을 ‘이기적 집단’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우리들’ 역시 현재 혹은 미래의 노동자라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힘을 실어주고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조’라는 단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림자들의 섬>이 시종일관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는 이유도 이에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영화는 한진중공업 사측에 자신들의 결연한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왔는지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사옥의 철창을 뜯고 로비를 점거하는 그 기세를 스크린으로 그대로 옮겨온다고 생각해보자. 투쟁에 대한 신념을 오롯이 전하는 데는 성공할지언정 일반 관객들에게 이 작품은 굉장히 과격하게 느껴질 것이며, 도리어 그들에 대한 거리감만 키우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림자들의 섬>은 이를 방지하려 한다. 김정근 감독은 먼저, 투쟁을 위한 투쟁을 일삼는 노조라는 편견을 지우기 위해서, 노동자 본연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한진중공업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들을 인터뷰한다. 이야기의 시작도 투쟁사의 시작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한진중공업, 혹은 대한조선공사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는지, 그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먼저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왜 충성스러운 노예의 길을 포기하고, 가시밭길인 노동자의 길을 선택했는지 묻는다. 그들은 모두 기계적 노예였다. 그러나 동료의 사망을 목격하고 조작된 진술서에 서명한 뒤 집에 가는 길에 그 동료를 기다리는 자식들을 보고 퍼뜩 정신이 든 김진숙을 시작으로, 점점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 즉 인간의 길을 선택한다. 그들은 내내 차분하게 자신들의 경험담을 관객들에게 말하고 감독은 그들에 대한 공감을 유도한다.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노동에 대해 무지한 일반인들도 쉽게 공감할만한 가족, 생계, 그리고 불합리에 대한 내용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림자들의 섬>은 한계도 명확하다. 4000명 남짓에서 마무리된 전체 관람객 수에서 알 수 있듯, 많은 사람에게 한진중공업 노조의 투쟁사를 전달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이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대다수 대중에게 가닿는다고 보기 힘들다. 물론 이것은 영화 제작에서의 잘못은 아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부족한 상영관으로 인해 일반인들이 접하기 힘들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인데, 오히려 이것이 바로 김정근 감독이 바꾸고 싶어한 것일 것이다. 노동 영화이기에 상업성이 부족해 상영관이 적은 현실을, 노동 영화이더라도 상영관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렇듯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전하는 이런 모습은 자신들을 반기지 않는 일반 대중을 의식해 자세를 한껏 숙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는 자료 화면 속에서 사측과 폭압적인 공권력에 맞서 싸운 노동자들의 과거와 크게 비교된다. 이들이 목소리를 이렇게 낮춘 것에는 그들이 목숨을 잃어나가도 외면한 사측, 정치권과 언론계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그러나 우리 역시 그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자신들의 권리를 얻으려는 이들을 이기적인 발악이라며 매도하고, 마치 그들과 자기 자신 사이에 제도적인 계급선이 그어져 있어 다른 세상 사람인 것처럼, 남의 일인 마냥 비웃었다. 우리 자신 역시 노동자임에도 말이다.
<그림자들의 섬>은 이런 이중적 태도를 혼내고 윽박지르지 않고 조용히 타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를 넘어 ‘강성노조’라는 만들어진 프레임에 휩싸여 사실상 그들과 다를 것 없는 처지임에도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댄 우리들과 노동자들의 연대를 추구하려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상처를 받지 않은 미래의 노동자가 지쳐 쓰러진 현재의 노동자를 이해하고, 자신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자고 말한다. 조남호를 비롯한 최상류층의 자본에 대항할 것은, 우리들에겐 그것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것은 그가 정말로 떨어져 죽을까봐 조남호가 무서워해서 스스로 생각을 바꾸기를 바란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절박함에 공감하고 같은 편에 서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동 환경은 뉴스에서 보듯-뉴스에서도 잘 안 나오지만-1990년작 <파업전야>, 1936년작 <모던 타임즈>나 1894년에 찍은 <공장 노동자들의 퇴근> 속 풍경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들이 나아가지 못한 것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했다. 같은 99%로서, 사람으로서, 다시는 한 명의 생명도 잃지 말아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