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과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통속 드라마에서 볼 법한 재벌들의 집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인공적 공간 대신, 내가 살아오면서 봐왔던 친근한 주변의 풍경들 속에서 태어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낡은 차의 문이 닫히는 소리, 오래된 방문이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극장의 스피커로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버닝>을 좋아한 이유는 또 있다. <버닝>은 내가 영화를 알차게 본 듯한 느낌을 준다. 이창동의 8년 만의 연출작이며, 칸에서 상을 받은 <버닝>을 보러 가는 나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한편으로는 남들은 다 좋다고 하는데 나만 이해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버닝>은 내가 원했던 것을 ‘제공’했다. 그것은 바로 영잘알이 된 듯한 느낌이다. 다행스럽게도 <버닝>이 선명한 영화였던 덕분이다. 하지만 왓챠에 별점 표시만 하고 이대로 흘려 보내기에는 손 끝에 뭔가가 남는다. 이 글은 <버닝>이 ‘지나치게’ 선명하기 때문에 쓰여졌다.
<버닝>은 나의 사사로운 걱정과 달리 아주 명확한 영화다. 서사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그 안에서도 인물 간의 구도와 대립 관계는 매우 선명하고 단순하다(고 느꼈다). 극 안에서 살아 있지 못하고 소모되는 여성 인물 해미, 벤에 대한 종수의 열등감, 해미에 대한 종수의 사랑과 판타지, 이런 종수에게 공감하는 20대 한국 남성 관객, 해미와 연주를 구경거리 삼는 벤과 그 친구들. 소시민인 종수는 자기가 사랑하는 해미를 죽인 상류층 벤에게 복수한다. 나날이 줄거리가 복잡해지는 요즘의 영화에서 이렇게 쉽게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는 작품은 흔치 않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선명해 보이는가? 그것은 <버닝>이 다른 영화와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작품은 바로 <다이 하드>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듯 <다이 하드>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들을 때려잡는다. 하지만 이 단순한 줄거리 이면에는 깊은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다시 쓰면 이렇다. 착한 미국 백인 남성 이성애자 경찰이 나쁜 독일 테러리스트들을 우람한 근육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혼자서 때려잡아 이혼해서 성을 바꾼 커리어 우먼의 사랑을 되찾는다. 이를 좀더 살펴보도록 하자. 존 맥클레인은 이혼한 전 부인 홀리 제나로와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뉴욕에서 LA로 온다. 서부 LA는 동부 뉴욕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홀리가 있는 층에 도착한 존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사람은 그에게 뽀뽀를 하는 남성이고, 또다른 남성은 남의 사무실에서 버젓이 마약을 흡입한다. 빌딩에서 파티를 벌이는 회사는 일본계이고, 물론 사장도 일본인이다. 한편 홀리 제나로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으로 자신만의 번듯한 사무실도 있고, 회사로부터 시계도 선물받았다.
이 평화로운 파티는 그러나 금세 외부 세력에 의해 점거당한다. 그들은 독일에서 온 테러리스트들이다. 앞서 등장했던 다른 남성들은 존과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짜 남자’ 존 맥클레인은 깨진 유리 위를 맨발로 걷고 총을 든 적 여러 명과 육탄전을 벌이며 이들을 모두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맨 몸을 거의 모두 드러낸 남성의 건장한 육체는 캐릭터와 별개로 그 자체의 존재감을 지켜내는 한편, 홀리가 회사에서 큰 계약을 따내 선물로 받은 시계는 (어쩔 수 없이) 벗겨지고 그의 성공을 가능케 한 일터는 폭파된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이 하드>가 영화 내내 너무 티 내지 않으려 했던 그 이데올로기가 유일하게 인물의 대사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존이 알에게 전 배우자를 홀리 제나로라고 소개하자, 그는 굳이 자신은 홀리 맥클레인이라고 정정한다.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가 어느 날 갑자기 영화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특히 <다이 하드>, 그리고 이를 비롯한 당시의 미국 영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1960~70년대는 여성이나 동성애 등의 다양한 민권운동이 터져나오던 시기였다. 특히 1970년대는 미국에서 페미니즘이 활활 타오르게 했다. 1973년에 임신 중단권이 인정된 것은 또다른 상징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는 보수주의자들에게도 하나의 기점이기도 했다. 종교적 원리주의자를 포함한 보수주의자들은 모든 형태의 산아 제한에 반대한다는 기치 아래 총집결했고 이는 당대의 정치 지형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경기 침체로 일자리를 잃은 남성 노동자들은 그 책임을 아이를 낳는 대신 사회로 진출한 여성에 돌린다. 그들의 판타지에서 여성은 강하고 모범적인 사나이로서의 자신에게 의존하는 순종적이고 순결한, 얌전한 아내로서의 여성이어야만 했다.
한편으로 1980년대는 독일과 일본이 세계 경제에서 두각을 나타낸 시기다. 이 때 이미 미국 경기는 앞서 언급했듯 침체된 상태였다. 공장의 1/3이 가동을 멈추고 실업률은 10%까지 오른다. 이들은 미국 남성들이 생각하기에 제조업 분야에서 실업을 촉발한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또한 그 이전, 미국은 자유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을 침략한다. 하지만 미국은 전쟁에 승리하지도 못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비인간적인 행위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무마하고자 미국 행정부는 민주당을 도청하려 하고, 이로 말미암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전국민을 충격에 빠뜨린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촉발된 반전 운동,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세력과 움직임에 대한 반대 운동, 그리고 앞서 언급한 페미니즘을 포함한 민권운동을 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이 약해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다시 ‘강한 미국’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70년대 후반 득세한 보수주의자들은 마침내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든다.
레이건 행정부 시대, ‘강한 미국’을 회복하고자 그의 주요 지지자인 남성들은 집결했고 그의 정책에 그들은 환호했다. 이 시대 영화에 나타나는 가장 특징적인 캐릭터가 바로 ‘하드 바디 영웅’이다. 수잔 제퍼드가 <하드 바디>에서 통찰한 바와 같이, 80년대에는 <람보>를 필두로 <슈퍼맨> 등 자신의 강인한 육체를 스크린에 전시하고 소위 ‘제3세계’의 테러리스트들을 쓸어버리며 여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남성적’ 캐릭터가 쏟아져 나왔다. 한편 조금 다른 결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78년작 <할로윈>이다. 여기서는 순결하고 모범적인 여성 캐릭터가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 대신 부모 몰래 술 마시고 성행위를 하는 문란한 미성년자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마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와 같은 영화 역시 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신보수주의의 경향 아래 조신한 여성의 청교도주의적 순결함을 강조하고, 여기서 만들어진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결과적으로 결혼 제도 아래에 묶어놓아 여성이란 남성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개는 혼자 살아야 하지만 여자는 그래선 안 되지.” 1988년작 <결혼 소동>의 실제 대사다.
영화 산업은 관객의 욕구에 봉사해야 했고, 산업이 만들어낸 남성적 캐릭터들의 유일한 목적은 현실 남성들의 판타지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현실에서 좌절되고 이루지 못한 판타지를 실현할 공간은 가상 세계뿐이었다. 영웅은 그를 상상하고 불러내는 이들과의 차이가 클수록 더욱 필요해지는 법이다. 그들의 결핍이 영웅을 불러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은 이미 TV에서 먼저 나타났고,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는 영화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 나타나게 된다. <다이 하드> 역시 이 영화 무리에서 단단한 한 축을 담당하며 미국의 신보수주의의 경향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현상으로써 등장한 것이다. 또한 그들이 자신을 동일시하는 영웅이 있다면, 그 자신을 떠받들어줄 여성 역시 필요하다. 적당히 예쁘지만 자신만을 바라보고 다른 남자에게는 절대 눈돌리지 않는데다가 지나치게 나서지도 않는다는 덕목을 모두 갖춘 ‘완벽한’ 여성상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8년이 되었고 한국에는 종수가 있다. 후줄근한 옷차림, 막 전역한 마냥 짧게 자른 머리, 멍해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실업률에 대한 뉴스를 들으며 밥을 먹는다. 종수는 무기력에 휩싸인 20대 남성의 표상이다. 즉, 그 역시 남성으로서, 영웅에 대한 필요를 느낄만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한편 그가 만나는 해미는 판타지 그 자체다. 그 조건을 열거하자면 1) 종수 스스로도 까맣게 잊었던, 아마 자기를 좋아했었던 것 같은 학창 시절 아이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2) 예쁘고 3) 갑자기 자취방으로 데려와서 키스하며 4) 천진난만하고(=순수하고) 5) 종수에게 먼저 연락해주며 6) 종수 말고는 다른 (남성) 친구가 없다. 그리고 그를 아프리카에서 처음 만나 같이 귀국한 벤이 있다. 말끔한 생김새에 부유한,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나와 여성의 관계를 침범하는 외부인이 있다.
종수가 벤에게 느끼는 열등감은 2010년대 20대 남성의 사회적 좌절감과 유사하고 1980년대 미국인이 유럽에 대해 느끼는 경제적 열등감과 동일하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종수는 이에 대한 화풀이를 해미에게 한다. 잠깐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면, 해미는 죽는(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거슬러 올라가보자. 왜 죽었는가? 벤과 함께 갔기 때문에 죽었다. 왜 해미는 벤과 함께 갔는가? 종수가 해미에게 남자 앞에서 함부로 옷 벗지 말라고, 그건 창녀나 하는 짓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왜 해미는 이런 말을 들었는가? 그가 옷을 벗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수의 말과 달리 전혀 ‘저급한’(=순결하지 못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관능적 육체를 두 남성 앞에 전시한 게 아니라,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사회와 인생의 무게를 던지고 달에게 새처럼 날아가고 싶어한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처지와 희망을 판토마임으로써 아름답게 표현했음에도 종수에게 어처구니없는 가스라이팅이나 당한 것이다.
종수가 이런 말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에게는 벤을 이길만한 그 어떠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핍이 쌓인 종수에게는 벤을 이길만한 영웅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웅은 가상 세계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영웅을 잃은 종수는 어찌 할 줄 모르고, 옷 함부로 벗지 말라는 말을 해미가 들으면 다른 사람 앞에서 몸을 내보인 것에 미안함을 느껴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난데없이 내뱉는다.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고, 해미는 기분이 상해 떠난다. 그런데 그 이후 해미가 사라진다. 그럼에도 벤은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고, 종수는 그를 스파이처럼 뒤쫓고 벤과 추격전을 벌이며 해미 실종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고자 활약한다. 결핍이 쌓인 종수에게는 영웅이 필요했고, 그는 결국 영웅을 스스로 불러낸다. 다름아닌 바로 그 자신이다. ‘하드 바디’도 없고, 아무런 격투 기술도 없지만 자신의 정신적 가상 세계로 호출된 영웅적 이미지와 함께 그는 해미를 ‘나쁜 외부인’ 벤으로부터 (마치 고양이를 구하듯)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그가 목격하는 것은 또다른 수많은 벤이다. 아마 다음 희생자가 될 듯한 여성을 둘러싸 구경하는 벤의 지인들, 혹은 분신들이다. 벤 하나만을 상대해 왔던 종수는 권력마저 가진 경제적 상위 계층의 집단을 마주한다. 그들은 제 2의 해미를 구경한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벤과 친구들 대신에, 오히려 징역형을 선고받는 사람은 종수의 아버지다. 법적 보호로부터 버려진 사람이 선택하는 것은 개인적 응징뿐이다. 이미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를 자신에 내재화한 종수는, 벤을 처단하며 영웅의 판타지를 실현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현실의 양극화적 상황에 반발해 상위 계층을 공격하는 전복의 이야기인가? 용산 참사를 슬퍼하는 미술품 옆에서 위선을 떠는 자들을 조롱하는 이야기인가?
영화 속 벤의 한 친구는 “한국은 미국과 닮았다”고 했다. 이 말은 2가지 방향으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개인으로써의 영웅을 갈구하는 심리다. 미국의 경우 슈퍼 히어로는 아주 대표적인 예이고, <다이 하드>, <람보>, <코만도>, <터미네이터> 등의 1980년대 하드 바디 영웅물 또한 그렇다. 한국은 국민들이 올바른 시스템보다 항상 영웅적인 정치인을 바라는 성향이 있다고 한 논설가는 말했다. 이들은 모두 산적해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청소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이따금 자신의 딸에게 범죄를 저지른 용의자에게 무참히 복수를 한 아버지의 소식이 들려오지만 거기까지가 끝이다. 개인적 복수를 한다고 해서 범죄는 줄어들지 않는다. 테러리스트는 무조건 쳐들어가서 다 죽이는 게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미국이 20년 가까이 학습하고 있는 중이다.
다른 하나는 여성을 수동적으로 묶어놓는 심리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적당히 조신하며, 적당히 매력적이고 적당히 남성에게 안기는 인형을 만들고자 한다. 박근혜를 끌어내리기 위해 광장에 나가 함께 나온 여성들의 외모를 품평하는 한국 남성이 그러했고, NFL 치어리더들에게 노출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순결을 강조하는 미국이 그랬다. 이들 모두는 자신이 평범하고 착한 남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믿고, 원칙을 지켜왔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의 저항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동안 누려왔던 혜택을 아주 조금만 잃어도 자신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간주하고 근엄하게 판결을 내린다. 종수는 해미에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평생 동안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다이 하드>와 <할로윈>,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남성주의적 영화들이 신보수주의 아래의 미국에서 태어났듯, <버닝>은 2018년의 한국에서 태어난 이야기다. 거세게 휘몰아친 진보의 물결, 그리고 그에 대한 격렬한 반동적 흐름은 한국 사회의 전형적 남성인 종수라는 인물을 빚어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1980년에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1988년에 홀리 제나로가 홀리 맥클레인이 되도록 요구했으며, 결국 2016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트럼프를 불러냈다. 하지만 이 반동 속에서도 ‘루저 클럽’이 27년(1989~2016) 만에 돌아온 페니와이즈를 무찌르는 <그것> 또한 태어났다. 우리도 이런 영화를 가질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 질문 전에 페니와이즈를 직시하는 순서가 먼저다. 나는 정말 평범하고 착한 남자인가? 가정폭력과 성폭력에 반대한다고 해서 내 스스로를 대단히 윤리적인 인물로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전에, 우리-남성들은 <버닝>을 보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이 평론이 쓰여진 이유다. 이 글은 <버닝>이 지나치게 선명하기 때문에 쓰여지지 않았다. 내 스스로가 몹시 부끄러워져 쓰여졌다.
참고 : 수전 팔루디, <백래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