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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섭 Mar 29. 2019

영화, 게임, 그리고 ‘나쁜 신’ - <퍼니 게임>

*<퍼니 게임>(1997), <퍼니 게임>(2007), <캐빈 인 더 우즈>(2011), <블랙 미러 4> 1화 : USS 칼리스터 스포일러 포함


2010년, 위키리크스는 한 영상을 공개했다. 헬리콥터에 탄 미군들이, 바그다드에서 전혀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사격하는 영상이었다. 군인들은 카메라와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사람들이 무기를 갖고 있다고 보고한 뒤 발포 허가를 받았다.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며 “나쁜 놈들 뒈진 것 좀 봐.”라고 농담하거나 숨은 사람들을 보며 킬킬거리기도 했다. 군인들에게 밑에 있는 이들은 그들과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피해자들은 그들에게 흐린 사격 화면 속 점의 집합일 뿐이다. 미국 공군에서 드론을 조종했던 마이클 하스는 2015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토록 무감각해지는 살인 임무를 수행했던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네바다에서 지구 반대편 아프가니스탄의 사람들을 드론으로 제거하는 역할이었다. 그는 통제실에 앉아 작은 화면을 보며 조종간으로 실제 사람을 죽일 때, 이건 아니라고 말하는 양심의 다른 면을 무시해야 했다. 또한, “별생각 없이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처럼, 모니터의 작고 검은 점을 없애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어야 한다고 고백했다. 피해자들은 전혀 반격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군인들의 모니터 속 게임의 적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동등한 대결이 아니다. 애초에 그들은 모니터를 지켜보는 사람을 건드릴 수도 없다. FPS 게임이라면 차라리 인간끼리의 경쟁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RPG다. RPG는 현실 세계의 인간이 게임 세계 속 적을 다 죽이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심지어 바그다드에서는 피해자들이 군인들의 게임에 참여할 생각도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게임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하늘을 유유히 선회하는 헬리콥터, 드론을 보며 언제 쏠지 몰라 불안해하고 그래도 살아보려 발버둥치지만 결국 죽음을 막지 못한다. 


위의 헬리콥터에 탄 군인들이나 RPG 플레이어 모두, 비유하자면 신의 위치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거의 절대자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모두 하늘에서 별안간 내려와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징벌을 내린다. 땅 위의 사람들은 헬리콥터를 건드릴 수조차 없고, 드론 조종사는 자신의 대리를 보낸다. 게임 플레이어는 적들과 아예 다른 세계에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전의 신들과 다른, ‘나쁜 신’이다. 기존 신들도 인간의 벌을 꾸짖기 위해 그들의 목숨을 빼앗은 적이 많다. 인간이 저지른 악행이 너무 많아졌다고 생각해 홍수를 내 모두를 익사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나쁜 신과 기존의 신이 명확히 구별되는 지점은 후회다. 노아의 방주의 원작이 포함된 <길가메시 서사시>를 보자. 지상과 명계의 신들은 인간을 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정작 대홍수가 일어나자 그들은 그 무시무시함에 너무 당황하여 도망치고, 이슈타르는 “어찌하여 신들의 모임에서 그런 말을 했던가?”라고 지난날의 발언을 후회한다. 실제 인명을 살상하며 ‘나쁜 신’의 역할을 수행했던 이들도 마이클 하스처럼 시간이 지난 뒤 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경우가 극히 드물다. 적이 너무 불쌍하다면서 게임을 그만두는 사람은 없다. 게임 속에서 그들은 죽음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들의 직업이 무엇인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플레이어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미리 프로그래밍되어 게임 속에서 자신의 킬 수를 조금 올리는 과정의 도구였을 뿐이다. 후회할 필요도 없다. 진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면 속 픽셀이 사라지는 데에 우리가 미안해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게임 플레이어에게 사살되고 조롱 당할 뿐이다. “하하하, 내가 맞혔어.” 


‘나쁜 신’은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방법이 살짝 다르다. 관객이 직접 행동하지 않고 스크린 속 세계의 인물이 행동하는 것을 지켜본다. 하지만 그 행동 역시 우리가 직접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세계에 사는 감독이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그 영화-세계와 세계 속 인물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액션 영화나 일련의 공포물에서 나쁜 신의 존재는 가장 두드러진다. <하드코어 헨리> 등의 액션은 주인공이 적들을 얼마나 멋있고 기발하게 제압해나가는지를 보여준다면, <쏘우> 시리즈, <데스티네이션> 시리즈 등의 공포물의 경우 불가사의한 인물, 혹은 상황이 인물들을 어떻게 끔찍하고 기상천외하게 죽이는지를 보여준다. 나쁜 신-관객은 액션 영화를 보면서는 주인공에 이입해 적을 물리치는 쾌감을, 주인공을 괴롭히는 공포 영화의 경우에는 악역에 이입해 주인공을 어떻게 사지로 몰아넣는지 감상하며 긴장감을 즐긴다. 주인공이 용케 탈출하는 결말이라 하더라도 그 전에 나왔을 조연들의 죽음을 즐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선혈이 낭자한 이미지 속에서 그들이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다 연기니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스크린에는 연기하는 배우들이 나오기 때문에 전혀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게임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역시 주인공에 맞서는 적들, 혹은 악역에게 당하는 주인공은 하나의 우주와 역사를 지닌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폭력과 고통, 죽음을 즐기고자 하는 영화의 목적, 곧 관객의 목적에 부합하는 프레임 속 픽셀의 집합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가 스크린에 영사된 2차원 이미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세계라면 어떨까. <퍼니 게임>(1997)의 피터가 말했듯 “영화에선 가상이 현실과 똑같은 현실”, 혹은 우리가 사는 세계-물질 세계에 반대되는 비물질 세계인 것이다. 스크린은 비물질 세계의 존재 조건이 아니라, 그의 이미지를 투영하여 물질 세계로 전달하는 통로일 뿐이다. 그렇다면 비물질 세계는 스크린이 없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 세계 속에서는 카메라가 꺼지고 영사기가 꺼져도, 그리하여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인물들이 각자 자기들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블랙 미러 4> 1화 : USS 칼리스터에서 이와 같은 세계의 예시를 찾을 수 있다. 로버트 데일리가 만든 <인피니티>라는 게임이 그것이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 게임은 개발자 로버트만의 전용 서버가 따로 있는데, 그가 접속을 해제하더라도 이 서버 속 인물들은 서로 의사소통하며 계속 살아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 목적은 게임-세계의 창조자 로버트의 게임 내 임무 달성이다. 그들은 그 세계에 소속되길 선택하지도 않았고, 빠져나오기를 선택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저 존재하면서 때로는 그의 마초적 강제 키스에도 따라야 하고, 그의 말을 거역해 괴물로 변해버린 이는 그의 결투 상대가 되어주다가 적당한 시점에 죽어줘야 한다. 엄연히 세계의 일부로 인생을 살아가지만 영화 속 인물이 관객-신에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2차원 이미지로 여겨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창조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존재 이유다. 


하지만 <퍼니 게임>(1997)의 파울의 말처럼, 2차원으로 투영된 스크린의 이미지에서 관객과 영화, 혹은 게임이 일방적 권력관계를 통해 “절대적 의사소통 불가능” 상태에 있다면, <인피니티> 속 USS 칼리스터의 승조원들은 주체적 의사 결정을 통해 스크린 너머의 물질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시도한다. 그들은 게임 밖 실제 세계의 나넷 콜에게 문자를 보내 행동을 이끌어내고, 결국엔 나쁜 신의 노리개로써의 운명을 자신들의 자유 의지로 벗어나는데 성공한다. <캐빈 인 더 우즈>(2011)에서도 마찬가지다. 마티 일행은 공포 영화의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캐릭터들에게 고통 받아왔던 주인공들의 집합체다. 연구소 직원들은 그들의 고통을 즐기는 나쁜 신들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제작진이지만 그 이전에 우리와 같은 관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극중극 속 마티는 카메라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스스로 자신의 위치가 “꼭두각시”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는 꼭두각시로의 운명을 거부하고 전기 배선을 망가뜨려 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킨다. 이렇게 ‘영리한 꼭두각시’인 데이나와 마틴이 불러낸 고대 신의 분노는 단지 연구소 직원들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고대 신의 손은 우리를 내려치면서, 꼭두각시들의 고통을 즐겨왔던 우리에게도 동시에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관객이 보기엔 여전히 스크린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의 손은 우리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당초 <캐빈 인 더 우즈>는 3D로 변환될 예정이었지만, MGM이 그대로 2D로 개봉함으로써 고대 신은 그대로 2차원 스크린 안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즉 우리가 본 것은 여전히 꼭두각시들의 재롱 잔치다. 영리한 꼭두각시들이 시스템을 무력화했지만, 우리에게는 어차피 꼭두각시일 뿐이다. 실제 관객과 영화 속 인물의 권력관계는 물질-비물질 세계 사이를 이동할 수 없듯이 여전히 공고하다. 꼭두각시들이 아무리 구조를 전복하고 영리한 전략을 짜도 우리는 ‘수고했어’라고 하고 신경도 안 쓴다. 나쁜 신들은 영화가 끝나면 극장을 나서서 그저 저녁이나 먹으러 갈 것이다. 


하지만 <퍼니 게임>은 다르다. 1997년작에서 여성은 몸을 다 가렸음에도, 2007년작에서 굳이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힌 채로 손과 발을 묶는다. 배우의 얼굴도 유명한 나오미 왓츠로 바꿨다. 이렇듯 비윤리적인 시선을 가진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의무 자체는 충실하게 수행한다. 또한 그들은 관객들을 위해서 재밌는 게임(Funny Game)도 하고 너무 일찍 끝나지 않을까 상영 시간을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참 평온하다. 단지 그들이 사이코패스라서는 아니다. 안나와 게오르그의 별장에 오기 전에 그들은 다른 별장에 있었다. 모두가 죽고 그들은 또다른 별장으로 이동한다. 그들에게 이 일은 매일매일 해야 하는 반복 작업인 것이다. 그들은 관객이 자극을 즐기기 위해 보낸 대리자다. 하얀 옷을 입은 천사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안나는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기도를 듣는 피터와 파울도 역시 꼭두각시다. 비물질 세계 안에서 물질 세계의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봉사한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주체로서의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신들을 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파울처럼 허무를 느낀 피터는 <캐빈 인 더 우즈>의 고대 신처럼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스크린에 갇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던 고대 신과는 달리 피터는 다른 방법을 택한다. 물질 세계와 스크린에 투영된 비물질 세계가 소통할 방법은 오직 하나다. 바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 동안은 “블랙홀”처럼 일방적인 시선의 방향으로 물질이 비물질을 바라봤지만, 이번엔 비물질 세계 속에서 피터가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성의 옷을 벗기고 가족을 죽인 것은 너희들이라고. 하지만 같은 감정 공간에 참여한 이상, 관객은 이미 영화에 유희적으로 동일시하며 공감적으로 교류했다. 이렇게 실컷 즐겨놓고서 극장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 영화 관객의 성질이다. 그런 우리를 피터는 별안간 붙잡고 묻는다. 당신도 하늘 위에서 총질하며 낄낄거리지 않았냐고, 가만히 앉아서 같이 죽여놓고 밥은 잘 먹고 다니냐고. 


*참고 
영화 : <퍼니 게임>(1997), <퍼니 게임>(2007), <캐빈 인 더 우즈>(2011), <하드코어 헨리>(2016), <쏘우> 시리즈(2004~), <데스티네이션> 시리즈(2000~2011), <살인의 추억>(2003) 
드라마 : <블랙 미러 4> 1화 : USS 칼리스터 

<길가메시 서사시>(BC 2000) 
하선규 (2008). 공간, 영화, 영화-공간에 대한 미학적 고찰. 현대미술학 논문집, (12), 295-333. 
https://collateralmurder.wikileaks.org/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5/nov/18/life-as-a-drone-pilot-creech-air-force-base-nev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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