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영화는 차고 넘친다. 어느덧 개봉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대표되는 대형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부터 시작해서 아카데미 시상식으로부터 온 좋은 작품성의 외국 영화들, 우리 나라의 로맨스, 가족, 스릴러, 신파 영화들은 어느 곳에서나 상영되고 언론과 팬들에게 늘 화제의 중심이 된다. 이것이 영화를 이루는 거대한 하나의 축, 그리고 이를 이루는 개개의 세포들이다. 한편 또다른 축이 있다. 장편이 있다면 단편. 박찬욱 감독은 전자가 소설이라면 후자는 시라고 했다. 특히 대부분의 단편은 이제 막 영화 세계에 입문한, 열정과 아이디어가 넘치는 신인 감독들이 만든 독립 영화다. 하지만 단편을 상영해주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영화제에서 실컷 보는 정도? 이번 단편 영화 상영관 시리즈에서는 오프라인, 온라인을 망라해 단편 영화를 볼 수 있는 곳, 그리고 현재 상영 중인 작품들을 소개한다. 첫번째는 홍대입구와 합정과 상수 사이에 있는 상상마당이다.
*영화의 리뷰 중 스포일러가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작품들은 스포일러가 감상을 방해하는 유형의 영화는 아닙니다.
사실 상상마당, 그 중에서도 영화관은 다른 곳과 비슷하게 장편 위주다. 하지만 상상마당이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장편 뿐만 아니라 매달 주제를 정해 단편 상상극장이라는 이름으로 3~5편의 단편 영화를 선정하고 상영한다는 점이다. 서울아트시네마도 인디스토리와 함께 비슷한 프로그램인 수요단편극장을 운영하지만 한 달에 1번 상영하는 것과 달리 상상마당의 경우는 그 달의 매주 화요일 8시, 많게는 한 달에 5번까지도 기회가 찾아온다.
이번 3월에는 3월 8일이었던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 감독의 연출로 완성된 작품들을 상영한다. 첫번째 영화는 <셔틀런>이다. 셔틀런이란 호루라기 소리가 날 때마다 짧은 거리를 왕복으로 달리는 것을 말한다. 이 작품에서는 체력장의 종목으로 셔틀런을 하는 초등학교의 한 반, 그 중에서도 한 여성 학생이 주인공이다. 그는 역시 여성인 체육 선생님에게 모종의 감정을 갖고 있다. 어린 아이가 선생님에게 가지는 호감을 마치 <우리들>의 카메라가 아역들을 대하듯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세하게 담는데, 이 장면들은 운동장 모래를 밟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풋풋하게 다가온다. 후반부의 묘사는 여러 가지 의미로 관객에게 긴장감을 안겨준다.
<9월>은 일종의 실험적 다큐멘터리다. 대사도 없고 특별한 사건도 없다. 다만 엄마와 딸이 사진을 찍을 뿐이다. 왜 찍는지, 여기가 어디인지 등의 정보는 전혀 제공되지 않고, 관객은 그저 그들의 사진 찍는 행위를 바라본다. 평범한 여행 사진 같았던 이들의 촬영은 '구름이 없어서', '바다의 물결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와 같은 이유로 미뤄지고, 관객은 그때서야 이들의 촬영이 뭔가 평범한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종국에 그들은 지구의 양수 속으로 원시의 모습, 태초의 관계로써 돌아간다. 인간과 인간, 또는 엄마와 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박제한 사진은, 사진가에 의해 또다른 의미의 양수에서 탄생한다.
<O_>는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은 한 아이다. 그의 눈은 아주 특별해서,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 아이의 시선에는 세상은 화려한 꽃밭과 사랑스러운 나비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그러나 곧 누군가 나타나 그의 환상을 깨뜨린다. 내가 꿈꾸던 세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나의 반응은 어떠할 것인가. 별안간 나타나 환상을 깬 당신은 악역인가 선역인가. 5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관객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핑크페미>는 여성운동에 헌신해온 이의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치원복의 치마마저 거부하던 모태 페미니스트가, 어떻게 커가면서 분홍색, 헬로 키티와 '사랑에 빠지며' 페미니스트임을 거부하게 되었는지, 미투 시국에서 다시 페미니스트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신의 어머니와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올해 여성의 날 당시에도 기업의 이벤트 이미지들이 분홍색으로 도배가 되어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는데, 남아름 감독의 경우는 사회가 강요한 여성성에 끼워맞춰졌던 스스로의 과거를 인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끊임없이 토론하고 고민한다.
<면도>는 기존에 공고했던 성 역할의 틀에 갇혀 있던 여성 인물이 남성만의 것으로 여겨졌던 면도라는 행위와 마주치며 겪는, 일종의 '파란 약 먹기' 스토리다. 남성들이 품평하는 소개팅 상대 여성의 거뭇거뭇한 수염, 민희는 그걸 들으며 자신의 인중을 걱정하고 결국 면도 도중 상처가 나고 만다. 남성들에게 면도 상처는 얘깃거리도 안될 정도로 흔한 일이지만 민희의 상처는 만나는 사람마다 신기하게 생각하는 구경거리가 되고, '착하고 예쁜 후배'로 살아온 민희는 점점 임계점에 다다른다.
이상 5편의 작품은 짧은 상영 시간 안에서도 장편 못지않은 깊은 울림, 여러 가지 질문을 파생시키며 신인 감독들을 힘차게 소개한다. 3월의 상영은 이제 3월 26일 오후 8시 단 한 차례밖에 남지 않았으니 극장에서 보고 싶다면 놓치지 말도록 하자. *참고로 <핑크페미>는 2019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