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공장을 치유하는 처방전
뒤스부르크-노르트 공원

비축생활 VOL.12 포스트플라스틱 서바이벌

by 문화비축기지

어쩌면 이 공원 덕분에 지금의 문화비축기지가 탄생했는지 모른다. 소임을 다한 산업 시설물을 오픈 스페이스로 변신시키는 도시 재생의 시작에 뒤스부르크-노르트 공원이 있다.

글 이명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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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학 석사 학위 논문의 주제로 버려진 산업 경관을 활용한 공원을 연구하다가 돌연 휴학계를 내고 유럽 답사길에 올랐다. 몸소 체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글을 쓰지 못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뒤스부르크-노르트 공원(Landschaftspark Duisburg-Nord)은 유럽 답사 버킷리 스트에 있던 첫 번째 공원이다. 19세기부터 철강 산업이 발달한 독일 서부의 공업 도시 뒤스부르크에 위치한 이 공원은 '공원 처방전'으로 되살아난 초기 사례다.


공원 처방전: 쇠락하는 도시에 새 생명을


우리보다 산업화를 먼저 거쳐 후기 산업 시대에 빨리 접어든 서구사회에서는 가동을 멈춘 산업 시설물 처리가 20세기 후반부터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공장 시설물을 없애는 대신 생태와 문화 기능을 더해 모든 시민이 즐길 수 있는 공원으로 변신시키는 프로젝트가 차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뒤스부르크의 거대한 공장 시설은 1985년부터 가동을 멈추고 방치되어 있었다. 유기된 공장 부지는 1991년 독일의 도시 디자이너 페터 라츠(Latz + Partner)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났다. 그는 건축물을 삭제하지 않고 땅의 기억으로 포용해 과감하게 재활용하는 한편 오염된 부지를 생태적으로 회복시키는 전략을 선보였다.


뒤스부르크-노르트 공원은 후기 산업 경관을 생태 문화 공원으로 바꾸는 도시 디자인의 유행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 초반 정수장을 리모델링한 선유도공원과 서서울호수공원이 재활용 생태 공원으로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면, 근래에는 석유 탱크를 대안적 문화를 생산하는 인큐베이터로 변신시킨 문화 비축기지, 고가도로를 다채로운 식물 화분으로 채워 녹색 활력을 불어넣은 서울로7017 등이 도시 재생이라는 흐름을 타고 우리 품에 안겼다.

녹슨 산업 시설물이 선사하는 '숭고'의 체험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당시 나는 선유도공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쓸쓸하고 덧없는 풍경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걷다가, 불현듯 눈앞에 출현한 생경한 광경에 놀라 순간 움찔했다. 우람한 공장 건물이 이름 모를 야생 식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육중한 공룡이 언제라도 굉음을 내며 포효할 것처럼 정글 속에 버티고 있는 듯했다.


KakaoTalk_20200923_084208422.jpg ⓒ이명준

철학자 칸트는 자연이 지닌 거대한 규모와 무시무시한 힘을 '숭고(sublime)'라고 분석했다. 숭고한 대상은 우리에게 먼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내 우리는 그 대상을 향유할 수 있다. 숭고의 체험이 바로 거기 있었다. 고개를 위로 끝까지 젖혀야만 온전한 모습을 가까스로 파악할 수 있는 거대한 구조물의 크기에 먼저 압도당했다. 구조물은 붉게 녹슨 고철덩어리인데도 마치 시뻘겋게 달아올라 열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그 실체 없는 기운에 심란해졌다. 이윽고 그 광경은 두려운 동시에 나를 매혹했다. 날것의 낯선 구조물에서 신비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생경한 감각은 공장 건물만 발산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명화의 상징이던 공장의 철골 구조는 야생 식물이 휘감아 뒤덮고 있었다. 야생 식물의 날것의 감각, 이마저도 아름답게 다 가왔다.


맥박이 멈췄던 공장은 생태와 문화를 원료 삼아 다시 시동을 건다. 복잡하게 뒤얽힌 공장 구조물은 대지의 표면에 돌출된 혈관 같다. 이제 혈관을 순환하는 것은 석탄이 아니라 식물이다. 물탱크와 파이프에는 정화된 맑은 물과 식물이 담겨 있다. 철광석 벙커 구조물에 심긴 소박한 꽃과 풀이 눈길을 사로잡기도 한다. 재료를 운반하던 철로 주변은 산책로로 변신했다. 스포츠와 문화 기능도 탑재했다. 투박한 공장 벽면을 암벽 등반 코스로 재활용하는가 하면, 거푸집의 잔해를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해 어떤 행사든 펼칠 수 있는 퍼포먼스 플랫폼을 디자인했다. 공원 구석구석 슬기로운 재활용 아이디어가 가득하다. 오염된 '브라운' 필드(brown field)는 이제 정화된 '그린' 인프라스트럭처(green infrastructure)가 되어 도시의 곳곳에 소생의 희망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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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이명준

황무지는 문명화되어 도시가 된다. 그리고 번성한 도시는 시간이 흐르면 빛을 잃고 낡아버린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다. 쇠퇴한 도시에 녹색 희망을 불어넣는 공원 처방전, 이 신박한 소생술은 앞으로도 한동안 효력을 발휘할 것 같다.



이명준

서울대 조경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경대 응용자원환경학부에서 조경학을 가르친다. 산업 폐허의 재활용 방법, 공원 아카이브 구축, 환경 디자인과 드로잉 교육, 20세기 전후 한국 공원사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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