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함

밤 9시 글쓰기. 24.10.14.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by 쿰파니스

스물일곱 살 가을에, <상실의 시대>를 만났다.

아는 여자들이 죄다 안고 다녔다.

300만 부가 팔렸다느니,

400만 부를 넘겼다느니,

무라카미 하루키는 엄청난 인기였다.

다 아는데 나만 모르니,

소외되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읽었다.

별 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리고

30여 년이 흘렀다.

<노르웨이의 숲>으로 다시 만났다.

글쓰기를 하면서 묘사하는 힘이 부족해서 불만이었다.

하루키 책이 도움이 될까 싶어 다시 꺼내들었다.

잡문 여행기 소설 가리지 않았다.

<노르웨이의 숲>을 그렇게 다시 만났다.

이번엔 좋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때는 나이 탓이었나 보다.

도서관에 반납하고 돌아서니 허전했다.

오십 넘은 아저씨가 소녀 감성이 발동한 건 아니다.

숲속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는 표지 때문도 아니다.

하루키 책을 한 권쯤은 소장하고 싶었다고 해두자.

견출지를 빼곡히 붙여 놓고,

밑줄을 그어 놓고,

비가 내리는 날, 커피를 마시며 읽기에 좋을 것 같아서.

동네 책방에 나들이를 나갔다.

붙이고 긋고 쓰면서 또 읽었다.

출판사는 현대인의 고독과 청춘의 방황을 선명하게 그려냈다고

모양새 나게 평했다.

쉽게 말하자면,

누구나 상처 하나는 안고 있다, 쯤 되겠다.

아픔을 이겨내고 행복해야 할 의무도 있고.

새삼 제목의 힘을 생각했다.

그때는 <상실의 시대>가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인 <노르웨이의 숲>으로 출판되었다면,

반대로 지금 <상실의 시대>로 나왔다면,

짐작하건대 둘 다 별로였을 것 같다.

1965년, 존 레넌과 폴 메카트니가

‘노위전 우드(Norwegian Wood)’라는 제목으로

비틀즈 앨범 <러버 솔>에 수록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같은 이름으로 소설을 썼고,

여자 주인공이 이 노래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게 오역 시비에 시달렸다.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노르웨이산 가구’라고.

우리나라에서도 곡 번역을 놓고 말이 많았다.

설마하니 영미 소설 번역가이기도 한 그가 실수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

노르웨이의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함, 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노르웨이의 숲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산 가구도 아니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답이 재치 만점이다.

원제가 '노잉 쉬 우드(Knowing She would)'

였다고도 했다.

직역하면 '그녀가 (나와) 하려는 걸 알아'이다.

레코드 회사에서 음란하다고 반대하자

존 레넌이 홧김에 바꾸어 버렸다고.

'노잉 쉬 우드'를 '노위전 우드'로.

시간만 나면 이 곡을 들었다.

가사도 외고 외웠다.

이거다, 하고 딱 잘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하루키의 말에 어렴풋이 공감이 갔다.

이 글을 쓰면서 무한 반복으로 듣는다.

멋진 사람을 만나니 생각거리가 많아 좋다.

오늘도, 하루키 덕택에 밤이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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