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백을 어깨에 걸친 채 역사 인문서 코너에 서서 책을 읽는다.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매일 문을 열자마자 와서 책 속으로 바로 들어간다. 한길사에서 나온 리영희 저작집이다. 제1권 “전환의 시대”, 제2권 “우상과 이상”, 제3권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 제4권 “분단을 넘어서서”,......... 제12권 “21세기 아침의 사색”까지 총 12권짜리 시리즈물이다. 벌써 일주일 넘게 와서 저러고 있다. 책을 사지는 않고 매일 출근하듯이 와서 책을 읽고만 가는 사람은 곱지 않다. 아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살 준비를 하는 것이다. 책방에 와서 책을 펼쳐보지 않고 휘리릭 둘러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고 마음을 고쳐 먹는다.
마침 한겨레신문의 한승동 기자가 진보초의 이와나미 북센터의 시바타 씨를 취재하러 와 책거리에 들렀었다. “口笛を吹きながら本を売る: 柴田信、最終授業”( 石橋毅史 著、晶文社)이 한국어로 번역출판이 되어 주인공 시바타 씨를 취재하러 온 것이다. 나는 안내 역할을 하였던 터라 취재를 마치고 한 기자가 우리 책방도 둘러보고 싶다고 하여 책거리에 모시고 왔다.
마침 커다란 백을 맨 여성이 여전히 선 책 책을 읽고 있었다. 한 기자와 나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한국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큰 백 여성이 갑자기 다가와 한국어로 자기도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끼어들었다.
그녀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섞이기도 했을뿐더러 도무지 맥락이 없는 단어며 문장들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하야미 씨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 결혼을 계기로 일본에 와 살다가 정신질환에 걸려 가족과도 함께 살지 못하고 혼자 산다고 하였다.
한 기자와 자리를 같이 한 뒤로부터 하야 미씨는 올 때마다 이제는 책을 읽지 않고 스탭이나 손님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고 때로는 손님들에게 큰소리를 지르기까지 하여 책거리의 쿤 문제아가 되었다. 가게란 손님을 골라서 받을 수 없는 맹점이 있다.
하루는 용기를 내서 하야미 씨를 밖으로 불러 점심을 같이하며 더 이상 책거리에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였더니 왜 그러느냐고 되려 내게 화를 냈다. 얼결에 책방은 도서관이 아니다, 라는 옹색한 변명을 하고 말았다.
몇 달이 지난 뒤 다시 하야미 씨가 책방에 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올 때마다 책을 한 권씩 사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자기 등 값나가는 잡화를 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여전히 누구도 알 수 없는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 내여 우리 속을 끓였다. 스태프들은 내게 강단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책도 사고 잡화도 사고 보란 듯이 손님 역할을 하는 하야미 씨에게 나는 책을 사지 않아도 좋으니 우리 책방에 더 이상 오지 말라고 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아, 손님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우물쭈물. 우물쭈물.
내가 말을 못 꺼낸 이유는 그녀가 통 크게도 리영희 전집 12권을 샀기 때문이다. 큰 백에 넣어가겠다는 것을 5,000엔 이상이니 무료배송 가능하다고 하여 댁으로 보내드리기도 했다. 아, 돈에 약한 사장을 스태프들이 어떻게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