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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 imagine Aug 20. 2020

12년 전, 내가 이곳에 집을 사지 않았더라면

결혼하고 신혼집을 구한 순간부터 부의 레벨이 달라진다고 한다. 일산에서 시작했는지, 판교인지, 마포인지 강남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 자가인지, 아파트인지, 빌라인지, 주택인지 등등등  



12년 전, 경기도 외곽의 한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30평대 신축 아파트였다. 맞벌이일 때는 집에서 잠만 자는 터라 방도 몇 개는 문 닫아놓고 쓰지 않았을 정도로 넓다 여겼다. 너무 넓어서 남들 다 하는 확장도 하지 않고 들어왔을 정도였다. 새로 조성된 지 얼마 안 된 동네라 버스도 거의 없었다. 집 앞에 이마트만 덜렁 하나 있었다. 운전도 잘 못하고, 차도 없는 내게는 손발이 묶인 것이나 다름없는 지역이었다. 직장이 있던 종로에 다녀오려면, 왕복 3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그래도 그때는 괜찮았다. 서울에 살아본 적 없는 내게 먼 이동거리란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이 멀어서 불편하다고 느꼈던 첫 순간은 임신 때였다. 출퇴근 시간이 너무 길어 배뭉침이 잦았다. 괜스레 겁도 났다. 이러다가 갑자기 아이를 잃는 건 아닐까 싶었다. 회사를 그만뒀고, 그나마도 첫 아이가 태어나자 모든 활동이 멈추었다. 아이가 어리니 대중교통으로 멀리 가기 어려웠고, 아이와 함께 만날 수 있는 사람도 갈 수 있는 장소 찾기도 어려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깜깜하게만 느껴지던 그때,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재택근무 에디팅 일을 찾았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에서 쉴 새 없이 키보드를 쳤다. 아이가 낮잠 자고 일어날 때까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일했다. 일이 익숙해지자 적당히 업무 시간을 나눠서 동네 아이 엄마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쓰시던 차도 하나 받았다. 아이 아플 때 급하게 근처 병원 가거나 이마트 갈 수 있을 정도로만 운전도 시작했다. 그러면서 삶이 조금은 편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아이는 하나만 가질 생각이었다. 바쁜 남편과 머나먼 친정 덕에 육아는 오롯이 내 책임이었다. 하나만 잘 키우기에도 벅찬 하루였다. 그런 내가 마음을 바꿨던 것은 단 하나, 엉엉 울던 첫째의 요청 때문이었다.


엄마!
 나만 언니 없어?
 나만 오빠 없어?
 나만 동생 없어?


그때도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우리 동네는 외동이 거의 없다. 아이 둘은 기본이었고, 아이 셋넷도 워낙 많았다. 어린이집에서 하원 하고, 놀이터에서 놀던 어느 날이었다. 평범했던 그 날, 별일 아닌 일로 형제자매끼리 편을 먹고 우리 아이를 따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좋아!
올해 안에 무조건
둘째 낳는다!!!!!


그렇게 악에 받혀 목표(?)를 발생했다. 첫째는 딸이었고, 둘째는 아들이었다. 둘째를 낳던 그날 느꼈던 안정적인 기분이 떠오른다. 마치 모든 것이 원했던 대로 제대로 된 자리에 착착 놓인 것 같았다. 갑자기 집안 분위기가 축제로 바뀌었다. 남편이 오래도록 공을 들이던 일도 점점 더 잘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다른 동네는 요동치던 집값이 이 동네만은 샀던 가격보다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초중고가 다 있고, 이마트가 코 앞에 있고, 도서관과 공원이 즐비하고, 집 베란다에서는 산이 보였다. 여름이면 무료 물놀이터가 오픈하고, 대형 쇼핑몰이 차로 10분 거리였다. 동과 동 사이 간격도 넓고, 고도제한이 걸려 있어 하늘이 넓게 보였다. 고층 대규모 아파트 단지보다 훨씬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한번 살기 시작하면 잘 안 나가기 때문에 오래된 이웃도 많았다. 한마디로 살기 좋은 동네였다.


다른 동네 다 오르는데, 왜 우리 동네 집값은 왜 이럴까 후회도 많았다. 무리해서 작은 평수라도 서울에 신혼집을 얻었어야 했을까. 신랑에게 이렇게 푸념하면, “그래도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잘 살았잖아. 집값이 오른다고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갈 것도 아닌데 너무 신경 쓰지 마.”라고 말하곤 했다. 서울로 이사 가는 사람들 보면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고 서울의 복잡한 삶이 자신 없어지기도 하는 감정이 널뛰듯 오갔다.



그랬던 집값이 2년 전부터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더니, 지하철이 오픈하고 난 지난주에는 분양가의 2배를 기록했다. 집값이 오른다고 이사 갈 건 아니지만, 살기 좋은 동네라고 생각되던 내 의견을 증명받은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부자가 된 듯 으쓱해지기도 했다. 앉아서 돈 번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12년 전, 잠실에 신혼집을 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값은 지금 우리 집값보다 2배는 더 올랐을 것이다. 아마 계속해서 회사를 다녔을 것이다. 아이도 하나만 낳았겠지 싶다. 하루하루 살기 급급해서 발만 동동 구르며 평일을 지내다가 주말에는 계속 잠만 자겠지. 가끔 경기도권에 있는 시댁을 방문하며 온갖 불평불만을 다 늘어놓았을 것이다. 요즘 주위에 있는 좋은 언니들도 못 만났을 것 같다. 내가 지금처럼 마음에 여유로 가득한 것은 12년 전 이곳으로 이사 왔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조금은 더 어른이 될 수 있게끔 도왔달까.


한 지역에 스스로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면서 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관계 맺는 법과 사랑을 하는 법을 배웠다. 나를 아끼고, 집을 아끼기 시작했다. 더욱 열심히 글을 썼다. 회사를 다니지 않고도 일할 수 있는 것도 알았다. 어찌 보면 12년 전 이곳에 온 것이 정말 다행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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