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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 imagine Jul 21. 2021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여름에 읽으면 더 재미있는 책 추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커피 한 잔 옆에 두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무라이 슌스케 건축사무소 식구들이 여름 별장을 방문하면서 생긴 이야기다. 맡아본 적도 없는 계수나무 향기와 좋은 나무로 만든 가구의 질감을 느끼며, 사각거리며 연필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정갈하게 음식 만드는 장면이 그려진다. 소담스러우면서도 다정하고, 우직하면서도 편안한 공간이 보인다.


한때 주택에 대한 열망으로 땅을 보러 다닌 적이 있었다. 예쁜 집 사진만 찾으러 다녔었다. 땅 시세를 정리해두고 고민하기도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에잇 하며 다 멈췄지만, 이 사람들에게라면 기꺼이 집을 맡기고 싶어진다.



##



P16


나는 그 시절의 선생님 건축을 십 년, 이십 년 뒤에 직접 보고 돌아다니면서 무라이 슌스케라는 건축가가 묵묵히 계속해온 일의 비범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고도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이한 자기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무라이 슌스케는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P19


잡일이라고 해도, 그 디테일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고 모든 것이 최대한 합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삼 주가 지나자 무라이 설계사무소 일은 건축물 투시도처럼 앞이 훤히 트이게 조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불합리한 명령도, 헛수고가 될 잡일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P27


모든 유리창이 열리고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여름 별장이 천천히 호흡을 되찾아간다.



P35


연필이 도면 위를 스치는 소리와 장작이 타고 튀기는 소리만이 산장에 울렸다. 졸참나무 장작은 향기로운 냄새가 났고, 가끔 섞인 벚나무 장작에서 희미하게 달콤한 냄새가 풍겨 팽팽하게 긴장된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산장 북쪽 작은 유리창은 완전히 눈에 덮여 하얀 장막을 친 것 같았다. ... 말이 토하는 숨은 완전히 새하얬고, 순식간에 서리가 되어 코와 눈 주위에 달라붙는다. 마차 위에서 바라본 마을은 눈이 아플 만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축축한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지가 부러진 나무도 있었다.


P62


목소리란  이상하다. 목적도 마음도 그대로 드러난다. 유키코의 온갖 것이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같고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없지만,  목소리는 사람을  설득한다. 귀에 쉽게 들어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설명으로는    없는 부분이 조금 남는다.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말의 의미  자체보다도 소리로서의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유키코의 목소리가 들리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유키코의 목소리를 모아 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P63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기타아오야마나 여름 별장이나 같았다. 시작해보니 분명히 그것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끓이는 향내처럼, 연필을 깎는 냄새에 아직 어딘가 멍한 머리 심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사각사각하는 소리에 귀의 신경도 전원이 켜진다.


P91


깨끗하게 다듬어진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태양을 쬔 잔디 냄새. 압도당할 것 같은 매미 울음소리.

오래되기는 했지만 소중하게 사용되어왔음을 알 수 있는 살아 숨 쉬는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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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건축에 들어서면 아무도 큰 소리를 안 내게 돼. 마음이 포근해지는 촉감이라든가 부드럽게 들어오는 광선이라든가... 늘 쓰는 사람이 한참 지나서야 겨우 알아챌 수 있는 장치들이 소곤소곤 말을 걸어오는 것 같거든. 사람 목소리도 거기에 맞춰 작아지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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