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porate venturing과 기업 성장 chapter 1.
이번 글에서는 IMF부터 아이폰의 본격 등장 이전 시기, 대기업들이 신성장 동력 발굴을 어떻게 해왔는가를 다뤄 보려고 합니다.
이전 글(클릭)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본격적으로 Corporate Venturing에 대해 다루기 전 도입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요. Corporate Venturing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기업들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IMF 이전에 우리나라 기업이 가지고 있는 위상은 극소수 분야를 제외하고는 최근의 중국 기업들의 그것과 비슷했습니다. 선진국, 특히 일본제품들의 마이너 카피를 제조하거나 선진국 사람들이 제조비용 절감을 위해 생산을 위탁하는 OEM 제품 공장에 불과했죠.
현대자동차가 용기있게 자기 브랜드로 미국 시장에 도전했고, 일본차보다 더 저렴하다는 이점을 내세워 한 해 10만 대를 넘게 판매하기도 했지만 품질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조선업이나 화학 등 대형 장치 산업들 또한 선진국 수준의 프리미엄/스페셜티 제품보다는 Commodity 수준의 제품들을 싼 값에 수출하는 형태였습니다. 삼성, LG도 전자렌지같은 소형가전에만 자기 브랜드를 붙였고, TV등은 당시 가전양판의 진열대에도 올려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애초에 위상도 높지 않았고 그걸 타파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들도 실패에 가까웠지만, 당시 국내 경제발전 상황이 견고하게 기업들을 받쳐주었기에 대기업들은 결국 국제적 경쟁에 어울리는 실력을 쌓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중견/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의 납품 업체로서 존재하게 되죠.
이 시기의 신사업 모델은 주로 일본 등 선진국의 제품과 사업을 베껴와서 한국에 적용하거나, 중소기업이 새로운 수요를 개척하고 시장 규모가 조금씩 커지는 기미가 보이면 대기업이 뛰어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작은 시장을 크게 성장시킨 공로도 물론 있습니다만 새로운 시장 창출 없이 약탈적인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한다는 비판, 소위 '문어발식 경영'을 한다는 손가락질을 받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90년대 이후 동구권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가 본격적으로 개방되면서 '세계화'라는 키워드가 우리나라 경제계를 강하게 드라이브합니다. 세계 곳곳에 진출해서 제품을 수출하고, 건설 프로젝트를 따내며 새로운 상품들을 국내에 들여오는 종합상사 비즈니스가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대우그룹('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그 곳이 맞습니다.)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다른 대기업들 역시 비슷한 비즈니스를 시도하면서 국내 최상위 대기업들은 모두 유사한 사업 모델을 가지게 됩니다. 즉, 금융업, 전자화학, 조선, 유통업, 건설얼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서로 경쟁하면서 또 서로를 복제하게 되죠.
대기업들이 이렇게 모든 영역에 진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극단적으로 낮은 자기자본으로 수십 개의 계열사를 만드는, 가공자본에 가까운 순환출자와 무한대의 은행 대출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70~80년 대 만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각 대기업들은 정치적 지원을 등에 업었고 은행 또한 폭발적인 경제 성장에 따라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IMF 직전에는 자기자본 대비 부채율 4,000%가 넘는 대기업이 나오기도 합니다. 극초기 스타트업도 아니고, 무려 대우같은 국내 Top 기업에서 벌어졌던 일입니다.
결국 이 거대한 버블은 IMF 사태를 불러오게 됩니다. 수 많은 기업이 도산하거나 헐값에 매각되었습니다. 대기업의 방만한 경영이 언론의 도마위에 오르면서 차츰 문어발식 경영은 사라지고 자기가 잘할 수 있는 핵심 분야에만 집중하는 문화가 나타납니다. 대기업 집단 지정에 따른 각종 통제, 금산분리나 순환출자금지 등의 원칙들이 등장했으며 몇몇 대기업들은 대주주들이 쫓겨난 두 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에 납품하던 중견 이하 기업들은 이런 충격파를 고스란히 맞게 됩니다. 특히 대기업이 관행적으로 발행하던 6개월 짜리 약속어음은 납품업체를 삽시간에 연쇄 도산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소위 '흑자도산'이 이어지고 중견/중소기업 경영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이후 대기업들이 불필요한 자산을 매각하고, 잘할 수 있는 핵심영역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기업 생태계는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합니다. IMF의 요구에 따른 가혹한 구조조정은 수많은 비극을 만들었지만, 부실기업과 부실자산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살아남은 기업들은 훨씬 낮아진 부채비율과 줄어든 이자비용에 힘입어 본격적인 경쟁력 축적을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일본은 부동산 버블 붕괴 이후 저성장 국면에 들어가 있었고, 중국의 저렴한 인건비는 노동 집약적 제조 중심이던 한국 기업들이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데 크게 일조했습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중간재를 중국에서 최종 조립한 후, 미국에 수출하는 모델은 이 때 만들어졌습니다. 그 당시 중국은 소득이 너무 낮은 관계로 시장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제조 공장으로서의 역할이 더 강하던 시기였습니다. 일본이나 미국으로부터의 기술 의존에 의존하던 모델도 차츰 국내 기업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기술을 가지고 경쟁하는 문화로 바뀌어 갑니다.
1998년 이후에는 IMF 과정에서 발생했던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그 당시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었던 초고속 인터넷망이 대대적으로 보급됩니다. 단순한 인프라 확충 수준이 아니라 공공 영역에서는 전자정부, 기업의 ERP, 금융권의 오픈 시스템 기반 전산화 등 대대적인 IT 인프라 구축이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다음, 네이버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 시기죠. 온라인 게임을 비롯한 각종 온라인 서비스들도 속속 등장하게 됩니다. 다만 이들 인터넷 기업들은 북미의 버블닷컴 붕괴 이후 기존의 전통적 기업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됩니다. 원래 통신업을 하던 SK 정도를 제외하면 '제조업 - 오프라인 유통 - 금융' 중심의 기존 산업체와 인터넷 기반의 벤처 산업은 서로 큰 교류 없이 지내게 됩니다. 90년대 말 인터넷 붐 때는 대기업 인력이 닷컴으로 이동하는 빈번했지만 닷컴 붕괴로 이런 연결고리는 끊어졌고, 10여년 뒤 금융 위기로 인해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됩니다.
기술 기반의 창업자들은 꾸준히 등장했습니다만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대대적으로 IT 사업 전담 계열사를 만들고 인력을 확보했던 대기업들은 실제 IT 사업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닷컴 버블이 전세계적으로 붕괴하면서는 인터넷 기반 사업에서 대부분 철수하게 되죠. 이후 대기업들에게 IT란 내부 재고나 영업, 회계 등을 관리하는 ERP 시스템이거나 이메일, 인트라넷 등 MIS(Management Information System), 혹은 회사를 소개하는 웹사이트 정도밖에 의미하지 않게 됩니다.
IMF 이후는 IT 분야로의 일시적인 외도를 제외하면 대기업들은 자기가 잘하는 분야에 집중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좁은 분야에서 역량이 차츰 누적되기 시작하면서 삼성전자는 2004년 미국 시장에서 최초로 소니를 앞지르게 되고, 현대자동차는 싸구려 자동차에서 벗어나 나름 번듯한 양산차 브랜드로 인정받게 되죠. 제철, 화학, 조선 등도 제조 분야에서 절대 강국이던 일본을 앞지르면서 세계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경쟁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웹상에서 서비스를 전개하던 소규모 벤처들이 차츰 고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온라인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영위하긴 하지만 테크기업은 아닌 업체들, 온라인을 통해 패션이나 유통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업체들이 이 때 처음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스타일난다, 지마켓 등이 나타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2000년대 초중반은 대기업에 납품을하던 2차, 3차 중소 제조 업체들도 중국 등으로 이전하기 시작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갖춰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신사업/신성장 동력이란 대기업 납품을 목적으로 해외 공장에서 생산된 저렴한 제품이었습니다. 대기업 납품량 이상을 생산한 후, 독자적인 루트를 통해 해외에 판매했습니다. 대기업의 종합상사를 통하지 않고도 해외 바이어와 직접 계약하는 방식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죠. 국내 의류 ODM 업체들은 대기업이 아닌 미국, 유럽의 대형 유통업체라는 새로운 거래처를 발굴했고, 급기야 1조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는 업체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중견 B2B 기업들은 경제 규모가 성장하면서 대기업 납품에만 매달리는 하청업체가 아닌 독립적인 사업을 가진, 작지만 경쟁력 있는 기업들로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들의 성장 전략 역시 동일한 제품을 가지고 새로운 고객을 찾는 연계 성장 전략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대기업과 중견기업 모두에게 큰 악재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시장인 미국의 소비자가 휘청거리는 사태였으니까요. 다시금 이자율이 치솟았고 역시나 체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은 도산했습니다. 그렇지만 IMF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암울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장 경제성장율만 봐도 1998년에는 -5.5%였지만 2009년에는 0.8%였으니까요. IMF 시절을 지나면서 기업체들의 부채 비율 등이 확실히 낮아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당장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경제 성장을 하면서 우리나라 기업들의 매출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전세계의 물가를 낮춘 셈이 되었고, 동시에 우리나라 기업들에게는 가깝고 효율적인 수요 시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을 생산 기지로 활용했던 이전과는 달리, 우리나라 기업들은 중국을 판매 시장으로 보고 진출하게 됩니다. 전형적인 연계 확장 전략의 일환인 '지역 확장(Regional expansion)'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국내에서 중국어 붐이 일어나고, 모든 대기업들이 중국 사업을 확장하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합작공장을 세워 차량을 생산하던 현대자동차 뿐만 아니라 삼성이나 LG같은 전자업체, 이마트, 롯데 등의 유통업체, 화장품같은 소비재 기업들까지 모두 다 차세대 성장 전략의 키워드는 '중국' 단 하나였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대기업들이 중국에 관심을 쏟는 동안 온라인 기업, 인터넷 기업 혹은 신기술 기업의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커지면서 기존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모바일 서비스입니다. 카카오톡, 쿠팡, 배달의 민족 등이 아이폰의 국내 출시 이후 2~3년 내 모두 서비스를 시작했죠.
IMF 이전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기업들의 신성장 동력 확보 방식을 요약해보겠습니다.
1980년대까지 신사업 진출은 그냥 돈이 되는 곳이라면 모두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정부 정책에 의해 사업 기회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고,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해외 업체나 다른 국내 기업들이 시장성을 상당 부분 검증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대로 도입하거나 경쟁사를 카피하는 시기였습니다.
1990년대에는 세계화가 추진되면서 한국에서 성공한 모델을 그대로 해외로 가져가는 지역 확장 전략을 실행했습니다. 원가, 특히 인건비가 중요했기 때문에 중국과 동구권에 공장을 세우고 저가 제품을 판매하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다 무리한 사업 확장과 과도한 부채로 인해 IMF를 맞이하게 되었죠. IT 신기술 분야에 잠깐 투자를 하지만 실체화에 실패했고 다시금 원래 사업의 본원적 경쟁력 강화에 집중하면서 세계 시장에서의 존재감을 갖게 됩니다.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 잠시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중국이 제공하는 새로운 성장기회 덕분에 버틸 수 있었고, 그동안 모바일을 중심으로 한 IT 기술 영역에 대해서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기업들이 대략 15년 기간 동안 인터넷 붐부터 중국 진출 러시까지를 경험하는 동안, 국내 스타트업들은 자기만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안정적인 성장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상황을 뒤집어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바로 스마트폰의 등장이죠. -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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